다실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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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봉산 양동리 3호분 현실 북벽
황해 봉산 양동리 3호분 현실 북벽
선사문화
개념
1기의 봉분에 2개 이상의 무덤방이 있는 굴식방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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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기의 봉분에 2개 이상의 무덤방이 있는 굴식방무덤.
개설

단실묘에 대응한 개념이다. 무덤방이 2개인 것을 2실묘, 3개인 것을 3실묘로 부르거나 다실묘로 부르기도 하지만, 무덤방이 몇 개 이상되어야만 다실묘라 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무덤방은 주인공과 껴묻거리가 안치된 널방[玄室]과 껴묻거리와 제사를 지내는 앞방[前室]로 구분되거나 앞방의 왼쪽과 오른쪽에 앞방보다 크기가 작은 딸린 방[측실 또는 이실]이 있거나 무덤방의 왼쪽 또는 오른쪽 1곳에 딸린 방이 있는 예도 있다. 그리고 널길의 왼쪽과 오른쪽에 딸린 방이 있거나 왼쪽 또는 오른쪽 1곳에만 딸린 방이 있는 예도 있다.

연원 및 변천

중국에는 한나라 때부터 다실묘가 등장하여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지배층의 무덤 형식으로 축조되었다. 한반도에는 서기 2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의 나무방무덤[목실묘]와 벽돌방무덤[전실묘]에서 2실묘가 처음 만들어졌는데, 채협무덤, 평양 토성동 45호, 석암리 120․204호, 덕성리 1호, 관산리 1․2호 등의 벽돌방무덤 등이 있다.

앞방의 왼쪽에 딸린 방이 있는 예로는 양동리 3호 벽돌방무덤이 있고, 앞방의 왼쪽과 오른쪽에 딸린 방이 있는 예는 남사리 29호 벽돌방무덤이 있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평양지역의 돌방무덤 중에는 앞방과 현실로 이루어진 2실묘의 사례로 평양 역전2실무덤·덕흥리벽화무덤·덕화리벽화무덤·약수리벽화무덤 등이 있다. 안악 3호 무덤은 현실·앞방과 앞방의 왼쪽과 오른쪽에 붙은 딸린 방으로 이루어졌다.

압록강유역의 집안 일대의 봉토분은 4세기부터 널길의 왼쪽과 오른쪽에 2개의 딸린 방이 있는 마선구 1호무덤·통구 12호 무덤·산연화무덤·무용무덤 등이 있다. 앞방과 현실로 이루어진 2실묘의 사례로는 모두루무덤이 있다. 삼실무덤은 크기가 비슷한 3개의 방이 ‘ㄱ’자 모양으로 배치된 다실묘이다. 요동성총은 4개의 방이 나란하게 배치된 특이한 형식의 다실묘이다.

고구려의 다실묘는 5세기 전반까지 축조되었지만, 5세기 후반, 특히 말 이후에는 모습을 감춘다. 백제에서는 사비기에 나주 흥덕리 고분 및 영동리 1호분 4호 돌방 등 2실묘(쌍실묘)가 매우 적게 축조되었을 뿐이고, 신라와 가야는 다실묘가 확인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고구려 고분 연구」(강현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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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홍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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