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만든 조상기로 불상에 사리를 모시기 위해 대좌 속에 납석제사리호를 봉안하고 다시 그 안에 청동제 사리용기를 넣어 사리장치를 이루었다. 사리호는 영태(永泰) 2년인 766년에 조성되었으며, 크기는 높이 14.5㎝, 입지름 9.0㎝, 몸지름 12.3㎝이다. 사리호의 몸체에 15행 136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고, 서체는 행서체를 주로 사용하였지만 초서와 반초서체 등이 섞여 있다. 한자와 함께 이두문과 이자(異字)들이 쓰였으며, 찬자와 서자는 알 수 없다.
조상기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영태 2년 병오 7월 2일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스님이 함께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豆溫) 애랑(哀郞)의 원(願)을 위하여 석비로자나불(石毘盧遮那佛)을 조성하고 안에 무구정광다라니(無垢淨光陀羅尼)를 함께 넣고 석남사(石南寺) 숲 깊은 곳에 있는 관음암(觀音巖)에 둡니다. 원컨대 이것은 두온 애랑의 영신(靈神)이나 두 스님이나 혹은 이것을 본 사람이나 비로자나불을 향하여 정례(頂禮)하고 멀리서 들은 사람이나 기뻐하는 사람이나 (불상의) 그림자를 지나는 무리나 불어서 지나가는 바람이 지나간 어느 곳에 일체중생이나 일체 모든 삼악도(三惡道)의 업(業)이 소멸하여 스스로 비로자나임을 깨닫고 세상을 떠나기를 서원(誓願)합니다.
(바닥면)
호(壺) 안의 것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은혜를 항성(恒性)으로 삼는 것이다. 두 개 반의 약(藥)은 꺼내어 병을 □하여 쫓는 것.
사리호의 바닥면에도 4행 23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동체부와는 서체가 다를 뿐만 아니라 내용도 이질적이어서 서로 다른 시기에 새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바닥면의 명문이 납석제호의 원래 용도와 관련된 것이고, 동체부의 명문은 원래의 용도에서 사리호로 전용되면서 추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조상기는 지리산의 전(傳)‘보선암 절터’에 있던 석조비로자나불상의 대좌(臺座)에서 발견되었다. 전‘보선암 절터’가 있던 내원사(內院寺) 계곡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공비토벌작전으로 산림이 거의 소실되었는데, 사리호는 수복 후에 나무를 캐러 다니던 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여러 경로를 거쳐서 1981년 부산시립박물관(현 부산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불상은 1947년 무렵에 전‘보선암 절터’에서 반출되었다가 1959년에 내원사로 이전되었다. 발견 당시 사리호 내에는 청동제사리용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조상기는 1986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199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6년 1월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조상기와 석조비로자나불상은 현존하는 비로자나불조상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조상기의 발견으로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의 출현이 최소 1세기 이상 소급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드물게 보이는 새로운 이두문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국어학적으로도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