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사리기는 중화(仲和) 3년인 883년 석탑을 조성하고 봉안하기 위해서 제작되었다. 사리기의 형태는 길이 17㎝, 지름 4.2㎝의 원통형이며, 표면에는 글자 크기가 0.8㎝인 명문이 쌍구체 행서로 음각되었다.
금동사리기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대저 성인(聖人)의 남긴 자취와 도를 행한 이의 현묘한 경지를 찾아내어 신령한 탑을 세워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은 명철한 임금이 마땅히 해야 할 규범이다. 옛날에 유신(裕神) 각간(角干)이 세상에 나서 큰 업적을 이루어 나라의 보배가 되었기에 삼가 이 큰 석탑을 만들었다. 중화 3년에 또 다시 … 이때에 보문사(普門寺)의 현여(玄如) 대덕(大德)이 무구정광경(無垢淨光經)에 의거하여 소탑(小塔) 77기를 만들고, 진언(眞言) 77벌을 써서 대탑(大塔)에 봉안하였다. 원컨대 집집마다 신묘한 보배를 갖고 사람마다 영명한 구슬을 얻으며, 육도(六道)의 중생이 모두 지식을 얻고 사생(四生)이 모두 기운을 받아, 이 뛰어난 업력(業力)으로 인해 함께 보리(菩提)를 증득(證得)하기를 바란다.
중화 3년 계묘 2월 일에 마치다.
금동사리기는 출토지와 발견 경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66년에 도굴된 황룡사탑의 사리장치를 회수할 때 함께 발견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황룡사탑의 사리장치로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경주 부근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고, 원래의 소재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리기의 명문에는 ‘유신각간(裕神角干)’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김유신(金庾信)과 관련하여 그 진위여부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