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이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안압지를 발굴할 때 명문이 새겨진 여러 벽돌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벽돌은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새겨져 있으며,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유일한 벽돌이다. 그러나 완형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3행 17자만 확인할 수 있고, 아랫부분의 명문은 파손된 것으로 보인다. 명문 벽돌의 크기는 가로 32㎝, 세로 31.5㎝, 두께 5.3㎝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 3리에 있는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기와가마터[瓦窯址]인 다경(多慶) 기와가마터에서 생산 · 공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문 벽돌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조로(調露) 2년 한지벌부(漢只伐部) 군약(君若) 소사(小舍)가 … 3월 3일 만든 …
명문의 첫 구절에는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조로(調露)’라는 연호가 있는데, 조로는 당(唐) 고종(高宗) 때의 연호로써 원년은 679년이다. 이후 680년에 ‘영융(英隆)’으로 개원(改元)하였기 때문에 이 연호는 1년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따라서 ‘조로이년’은 680년(문무왕 20)에 해당된다.
명문 벽돌은 신라 6부에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벽돌을 제작하는 기술자 문제 등 신라의 정치 · 경제 · 사회 문제의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신라 와전류의 양식과 문양을 편년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로서 미술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