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는 전황이 악화되고 그에 따라 전시 식량 부족이 심각해지자 1942년 3월 30일 “공습하의 식량 배급의 확보를 기한다”는 명분으로 경성에 식량보국대를 결성했다.
경성식량보국대 결성식은 1942년 5월 30일 조선신궁에서 이루어졌다. 경성부 내의 각 식량[백미와 잡곡] 판매업자, 가공업자, 운송업자, 창고업자를 망라하여 부내 각 경찰서 단위로 각기 1중대를 조직하고 중대장은 경찰서장이 담당했다. 그 상위에 경기도 경찰부장이 사령관, 경제 경찰 과장이 막료장이 되었고, 각 경찰서 단위의 중대와는 별개로 사령관(경찰부장) 직속으로 특별 정신대도 조직했다. 만일 공습을 당할 때는 계통적으로 경찰부로부터 경찰서로 다시 경방단과 긴밀한 연락 아래 일반 부민에게 식량을 빠짐없이 배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대규모 공습 하에서 중대 활동만으로 식량 배급이 어려운 상황일 때는 ‘특별 정신대’를 출동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성부 식량보국대 결성에 따라 각 경찰서 별로 중대를 편성하였다. 영등포에서는 1942년 4월 1일 영등포경찰서 관하 관할 구역을 중심으로 대원 158명으로 식량보국대를 편성하고 바로 훈련을 개시했다.
이렇게 결성된 각 경찰서별 식량보국대는 식량 배급을 원활히 한다는 명분으로 조직했지만, 실제 그 내용은 전쟁을 위한 노동력 동원과 군사훈련이 중심이었다. 1942년 4월 10일 식량보국대 서대문부대는 서대문국민학교 교정에서 고바야시(小林) 서대문서 경제계 주임의 지도 아래 각개 교련을 실시하며 전시 동원을 위한 정신훈련을 진행했다. 식량보국대 영등포부대에서는 평소에도 대원 훈련을 진행했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심지어 일요일에도 증산 혹은 근로봉사 등에 대원을 동원했다. 1943년 8월 22일 전 대원이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여의도에서 마초 1천 50관을 베어 군용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4년 5월 30일에는 경성식량보국대 결성 2주년 기념일을 맞아 “결전 하 대원의 감투정신을 앙양하고 상시훈련의 성과를 사열하는” 직역감투대회가 열렸다. 여기에 모인 식량보국대원은 1200명으로 모두 전투모에 각반을 찬 군인의 모습이었다.
경성식량보국대는 경찰서 단위로 전시 식량 확보를 명분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그러나 실제는 경성부민을 전시 노동력과 병력으로 동원하기 위한 각종 노력 동원과 군사훈련을 실행하고자 조직한 것으로 1945년 해방 당시까지 존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