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흥업주식회사는 1914년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가 설립하여 일제 말까지 존속한 거대 농업회사이다. 후지이 간타로는 후쿠시마현 출신으로 1904년 후지모토합자회사 조선 지점을 설치하고 농지를 구입하여 후지모토농장을 경영하였다. 조선 농지의 수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임익수리조합과 대정수리조합을 설립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지원과 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아 대규모 수리 사업을 중심으로 미곡 생산과 유통 사업을 확장하며 식민지 조선의 대규모 농업회사로 성장하였다. 불이흥업이 경영하는 농장에서는 가혹한 소작 조건으로 많은 소작쟁의가 발생하였다.
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는 일제하 ‘조선 수리왕(水利王)’이라는 별명을 얻은 후지이 간타로가 1914년 설립한 농업회사이다.
수리조합 사업을 중점으로 하였으나 1920년대 말 경영 악화로 조선식산은행에 인수되었다. 1937년 이후 전시 체제 하에서 사세 확장을 도모하며 일제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창업주 후지이 간타로는 1876년 후쿠시마(福島)현 출신으로 러일전쟁 발발 후인 1904년 3월 일본군을 따라 내한하여 후지모토합자회사(藤本合資會社) 조선 지점을 설치하고 약 1,500정보의 농지를 구입하여 후지모토농장(藤本農場)[뒤에 불이전북농장이 됨]을 경영하는 한편 무역상도 병행했다.
농사 경영에 착수한 그는 조선 농지 대부분이 천수답으로 농사 개량 투자의 위험성을 깨닫고 수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06년 수리조합조례가 발표되자 이를 기회로 임익수리조합(臨益水利組合)을 설립키로 하여 1911년 준공했다.
1911년 평안북도 압록강구에 대규모 간척사업을 시작하였고, 이것은 이후 불이서선농장이 되었다. 1913년에는 대정수리조합(大正水利組合)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총독부의 정책적 지원과 각종 은행의 자금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후지이 간타로는 1914년 초 자본금 1백만 원 규모의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오사카 지역 자본가를 중심으로 창립 발기인을 모아 1914년 4월 8일 불이흥업주식회사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창업기(1914~1918) 불이흥업의 중점 사업은 수리사업이었다. 서선사업지(평안북도 압록강구) 간척 공사, 대정수리조합(평안북도 용암포) 공사에 이어 1919년 익옥수리조합(益沃水利組合)(전라북도 익산)을 설립하여 1백 척이 넘는 조선 최초의 콘크리트 댐으로 설계된 익옥수리조합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만성 불황과 세계 공황으로 자기 자본 조달에 차질을 빚은 데다 미가 하락과 서선농장의 장기간 소작쟁의까지 겹쳐 20년대 말 불이흥업의 재무구조가 극히 악화되면서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주 채권은행인 조선식산은행은 20년대 후반부터 불이흥업의 기구 개편, 이사 선임, 사채(社債) 발행 등에 간섭과 통제를 가했고, 30년대 초에는 기구 개편, 자본금 변경, 중역 선임에 개입함은 물론 업무 조사, 회계 감독까지 했고 결국 조선식산은행의 자회사(子會社)인 성업사(成業社)를 최대 주주로 만들고 1930년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를 은퇴시켰다.
소유권과 경영권을 조선식산은행에 넘긴 30년대 중반 이후 불이흥업은 준 전시 체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일본 경제가 인플레이션 정책과 저금리 정책으로 공황에서 벗어나자 경영 정상화에 성공했고 중일전쟁 이후 본격적인 전시 체제를 맞아 단순한 위기 극복을 넘어 미증유의 사세 확장을 맞았다.
이에 따라 조선식산은행은 창립 이래 각 지점장과 본점 과장, 이사, 감사 등을 역임한 식은 출신 인사를 대규모로 불이흥업 중역회에 파견했다. 1940년 조선식산은행 산하의 농업 3사인 성업사, 불이흥업, 조선개척을 중심으로 공동 인수단을 구성하여 조선농기구제조㈜를 설립하는 한편 1944년 조선개척을 불이흥업에 흡수 · 합병시켰다. 산하 농업회사의 통폐합을 추진한 것인데 이로써 일제 말기 불이흥업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버금가는 거대 농업회사가 되었다.
1914년 설립된 불이흥업은 대규모 수리 사업을 중심으로 미곡 생산과 유통 사업을 확장하며 성장한 식민지 조선의 대규모 농업회사이다. 그러나 1930년대 경영이 악화되면서 조선식산은행에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전시체제 하에서는 오히려 사세가 확장되어 거대 농업회사가 되었다.
불이흥업이 경영하는 농장에서는 가혹한 소작 조건으로 인해 많은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해방 후 불이흥업은 미군정의 일본인 재산 동결 및 이전 제한 조치로 미군정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가 1946년 2월 해동흥업공사로 사명(社名)을 변경하고 소속 농지를 계속 경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