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중일전쟁 도발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과 노동력의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본국은 성인 남성이 대부분 군인으로 징집되면서 농촌 지역에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아직 징병제가 실시되지 않은 조선에서 노동력을 공급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는 “내지(일본) 농촌의 총후봉공(銃後奉公)의 실정과 진보된 영농법을 반도 청년에게 체득케 하는 동시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구현하고 조선의 농업 생산력 확충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1940년 이후 매년 봄 농번기에 전국 각도에서 우수한 청년을 선발하여 일본 농촌에 파견하는 조선농업보국청년대(朝鮮農業報國靑年隊)를 편성했다. 이렇게 선발된 조선 청년은 일본 농촌의 군인 유가족 가정에 기숙하며 그곳의 노동력 부족을 대체하도록 했다.
총독부가 제시한 조선농업청년보국대 선발대상은 1) 도립(道立)의 농민도장(農民道場), 개조농업보습학교 졸업생으로 성적 우수한 자, 2) 귀향 후 농업생산보국운동에 진력하고 현재 부락의 중핵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 3) 몸소 농업에 종사하고 그 개선에 대해 상당한 체험을 가진 자, 4) 연령 18~30세 미만으로 품행 방정 신체 강건한 자 였다. 각 항에 적합한 자 중 몇 차례의 선발 과정을 거쳐 대개 20, 30명으로 1반을 구성하고, 반장은 농민도장 또는 농업보습학교 일본인 직원 중에서 지도자 1명을 선발하여 담당하게 했다. 각 대원들은 일본 파견 전에 각 도에서 5일간 집합 훈련을 받고 파견지의 사정을 숙지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1942년의 경우, 각 도에서 보국대원 300명을 추려 나라(奈良), 미에(三重), 시가(滋賀), 기후(岐阜)현 등 근기 지방의 가장 집약적 영농을 하고 있는 농촌에 보내어 출정 군인 유가족 농가에 배치하여 보리 추수 모내기에 협력하도록 하였다. 일행은 6월 2일 조선을 떠나 일본 각 현에 배치되어 한 달 동안 농촌에서 일하고 나라 부근의 성지를 순배하고 다시 도쿄로 가서 궁성을 요배하고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을 참배한 후 7월 10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총독부는 조선농업청년보국대를 통해 일본 본토의 농업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고, 농촌 청년 중 소위 중견 인물로 양성하여 그들을 농촌 통제와 농업 생산의 핵심 세력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 농촌으로 돌아와 조선 농업의 중추 세력으로 활동하기에는 부족하여, 농촌 사회 내부에서의 영향력은 미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