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외도는 서기전 500년 무렵 인도에서 활동하던 6명의 자유 사상가를 가리킨다. 푸라나 캇사파, 막칼리 고살라, 아지타 케사캄바린, 파쿠다 캇차야나, 산자야 벨랏티풋타, 니간타 나타풋타이다. 이들은 붓다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다.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들을 ‘육사외도’라 한 이유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의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물론, 쾌락주의, 숙명론, 도덕 부정론, 회의론, 고행주의와 같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육사외도(六師外道)[cha-tīrthika(산스크리트어, 이하 ⓢ로 표기), cha-titthiyā(팔리어, 이하 ⓟ로 표기)]는 붓다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들을 ‘육사’가 아닌 ‘육사외도’라 한 이유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의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불교가 흥기할 무렵인 서기전 6~5세기의 인도는 사회적 · 사상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족의 정착이 마무리되면서 농업 생산의 증대와 더불어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의 발전을 촉진하고,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도시에서는 상공업자들이 화폐경제에 의해 큰 부를 축적하였으며, 길드와 유사한 조합을 구성하고 완전히 도시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제까지는 제사를 관장하는 브라흐마나(ⓢbrāhmaṇa)와 정치를 관장하는 크샤트리야(ⓢKṣatriya)가 사회의 지배자였지만,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상공업자와 서민인 바이샤(ⓢvaiśya)에 의해서 기존의 카스트 제도는 질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사정을 배경으로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Brahmanism)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많은 자유사상가들 · 종교 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이 바로 어원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란 의미를 지닌 사문(沙門, ⓢśramaṇa, ⓟsamaṇa)이다.
이들은 유물론, 쾌락주의, 숙명론, 도덕 부정론, 회의론, 고행주의와 같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불교의 문헌들에서는 이들이 62가지로 분류되어 ‘62견(見, ⓢdvāṣaṣṭi-dṛṣṭi, ⓟdvaṭṭhi-paṭipadā)’이라 하고, 그 가운데 특히 유력한 6명의 지도자를 칭하여 ‘육사외도’라 하였다.
푸라나 캇사파(ⓢPūrana Kāshyapa, ⓟPūraṇa Kassapa)는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더라도 악을 행한 것은 아니며, 제사, 보시, 수양 등을 해도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선악의 행위는 도덕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무도덕주의(無道德主義) 또는 도덕 부정론(道德否定論)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은 당시 도시 문화의 도덕적 난숙함과 그에 따른 도덕적 퇴폐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나중에 강물에 들어가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막칼리 고살라(ⓢMaskarin Goshālin 또는 Maskarin Goshālīputra, ⓟMakkhali Gosāla)는 모든 생명체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나 그들이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은 원인도 조건도 없다는 우연론(偶然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사람의 행위나 운명은 모두 자연계의 운행이 정한 약속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며, 그대로 방치해 두면 840만 대겁(大劫)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경과하여 저절로 해탈에 도달한다고 하는 숙명론(宿命論, fatalism)을 주장하였다.
초기 불교의 문헌들에서는 이것이 ‘윤회를 통한 청정(ⓟsaṃsāra-suddhi)’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인간의 노력이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결정론(決定論, determinism)을 옹호하였다. 그는 생명체가 땅 · 물 · 불 · 바람 · 허공 · 득 · 실 · 괴로움 · 즐거움 · 태어남 · 죽음 · 영혼이라고 하는 12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엄격한 고행(苦行)[ⓢtapas, ⓟtapo]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가 세운 교단을 ‘아지비카(Ājīvika)’라고 한다.
아지타 케사캄바린(ⓢAjita Keshakambala 또는 Ajita Keshakambalin, ⓟAjita Kesakambalin)은 인간이 흙 · 물 · 불 · 바람의 4원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죽으면 각 원소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이 생전에 짓는 종교적 · 도덕적 행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이요, 인식론으로 보면 감각론(感覺論, sensationalism)이요, 실천적 측면에서 보면 쾌락주의(快樂主義, hedonism)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생각된다.
파쿠다 캇차야나(ⓢKakuda Kātyāyana, ⓟPakudha Kaccayāna)는 땅 · 물 · 불 · 바람의 4원소 외에 괴로움 · 즐거움 · 생명을 추가하여 7요소를 설했다고 한다. 또한 7요소는 불변하기 때문에 비록 사람을 죽이더라도 칼은 이 7요소의 간격을 통과했을 뿐이며 살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요소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후세의 바이셰시카(Vaiśeṣika)로 계승 · 발전되어 갔다.
산자야 벨랏티풋타(ⓢSamjayin Vairatīputra, ⓟSañjaya Belaṭṭhiputta)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거나 서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회의론(懷疑論, skepticism)의 입장도 취하였다. 즉 내세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뱀장어와 같이 잡기 어려운 답변(Ⓢamarā-vikṣepika, Ⓟamarā-vikkhepika)’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사조는 어떠한 의미에서 붓다의 무기(無記, Ⓢavyākṛta, Ⓟavyākata)와 4구부정(四句否定)에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니간타 나타풋타(ⓢNirgrantha Jnātiputra, ⓟNigaṇṭha-Nātaputta)는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Mahāvīra)이다. 니간타(Nigaṇṭha)는 오래전부터 있던 한 교단의 명칭이었으나, 그가 이 파로 들어간 뒤에 그의 설을 고쳤으므로 자이나교가 성립되었다. 그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주의(不定主義, syādvāda) 또는 상대주의(相對主義, anekāntavāda)를 내세웠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엄격한 고행(苦行, ⓢtapas, ⓟtapo)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않고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오대서(五大誓, ⓢpañca-mahā-varata)를 제정하였다.
그의 세계관은 세계가 영혼(jīva)과 비 영혼(ajīva)으로 대별된다고 보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 특징이다. 그리고 비 영혼은 운동의 조건(dharma), 정지의 조건(adharma), 허공(ākāśa), 물질(pudgala)의 4실체(asti-kāya)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는데, 때로는 별도로 시간을 부가하는 경우도 있다.
자이나교를 제외하면, 이들 자유사상가들의 교단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아지비카만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시대까지 불교와 자이나교와 함께 유력한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후대에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한편 자이나교는 마하비라의 시대에 이미 유력한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후 불교와 함께 바라문교에 대항하는 혁신적 종교의 양대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서기전 3세기에 자이나교는 동인도에서 서인도의 구자라트(Gujarat)와 라자스탄(Rajasthan)으로 이주했다. 현재도 이 지역의 상인 계층을 중심으로 수백만의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육사외도는 비록 유물론, 쾌락주의, 숙명론, 도덕 부정론, 회의론, 고행주의와 같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는 측면에서 공통된다.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이단적 · 혁신적인 사상 조류는 서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면서 불교가 태동하던 당시에 커다란 소용돌이로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