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해윤(嚴海潤)은 1863년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부내면(府內面) 행정리(杏亭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직업은 의원(醫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상남도 진주(晋州)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의병장 노응규(盧應奎)가 1906년 가을 충청북도 황간(黃澗)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여하여 선봉장(先鋒將)이 되었다.
엄해윤은 무기 구입과 제조 및 훈련을 담당하였으며, 군비(軍備)가 갖춰지자 철도 등 일제의 군용 시설을 파괴하고 적의 척후병을 섬멸하였으며, 각 지역의 의진(義陣)과 연계한 대규모의 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계에 속아 1907년 1월 노응규를 비롯하여 서은구(徐殷九) · 노공일(盧公一) · 김보운(金寶雲) · 오자홍(吳自弘) 등과 함께 친일 순사(巡査) 이연직(李淵直)에게 체포되었다. 이들은 검사의 심문에 강경한 태도와 답변으로 항일 토적(討賊)의 대의를 주장하며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1907년 7월 서은구 · 노공일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백령도(白翎島)로 7년 유형(流刑)을 받아 유배되었으나,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특사로 곧 풀려났다. 1908년(융희 2) 11월경부터 의병장 이은찬(李殷贊) 의진의 참모로 지내면서 경기도 양주 · 포천 · 연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은찬 의진에서 이종협(李鍾協)의 1대가 분리되자, 같은 해 12월 이종협 의진의 참모로 들어가 황해도 금천(金川) · 토산(兎山)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9년 4월 13일 경성감옥 10번 방에 투옥 중 비바람이 부는 틈을 타 함께 수감되어 있던 유문재(柳文在) · 유현서(柳鉉西) · 오남석(吳南石) · 이성팔(李聖八) 등과 파옥(破獄)을 모의하고 일본인 간수를 폭행하고 탈옥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월 20일 대심원(大審院)에서 탈옥 정황이 인정되어 강도 및 수도(囚徒) 도주죄로 교수형을 받고 1909년 11월 30일 순국하였다.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