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대한제국기 1906년 노응규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07년 이은찬 의진에서 참모로 활동한 의병장.
인적 사항
주요 활동
엄해윤은 무기 구입과 제조 및 훈련을 담당하였으며, 군비(軍備)가 갖춰지자 철도 등 일제의 군용 시설을 파괴하고 적의 척후병을 섬멸하였으며, 각 지역의 의진(義陣)과 연계한 대규모의 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계에 속아 1907년 1월 노응규를 비롯하여 서은구(徐殷九) · 노공일(盧公一) · 김보운(金寶雲) · 오자홍(吳自弘) 등과 함께 친일 순사(巡査) 이연직(李淵直)에게 체포되었다. 이들은 검사의 심문에 강경한 태도와 답변으로 항일 토적(討賊)의 대의를 주장하며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1907년 7월 서은구 · 노공일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백령도(白翎島)로 7년 유형(流刑)을 받아 유배되었으나,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특사로 곧 풀려났다. 1908년(융희 2) 11월경부터 의병장 이은찬(李殷贊) 의진의 참모로 지내면서 경기도 양주 · 포천 · 연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은찬 의진에서 이종협(李鍾協)의 1대가 분리되자, 같은 해 12월 이종협 의진의 참모로 들어가 황해도 금천(金川) · 토산(兎山)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9년 4월 13일 경성감옥 10번 방에 투옥 중 비바람이 부는 틈을 타 함께 수감되어 있던 유문재(柳文在) · 유현서(柳鉉西) · 오남석(吳南石) · 이성팔(李聖八) 등과 파옥(破獄)을 모의하고 일본인 간수를 폭행하고 탈옥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월 20일 대심원(大審院)에서 탈옥 정황이 인정되어 강도 및 수도(囚徒) 도주죄로 교수형을 받고 1909년 11월 30일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단행본
- 『강원도사-의병·독립운동』 20(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17)
- 『독립유공자공훈록』 14(국가보훈처, 2000)
- 『독립운동사』 1(국가보훈처, 1970)
판결문
- 「判決文」(大審院, 1909. 10. 18.)
- 「判決文」(京城控訴院, 1909. 9. 17.)
- 「判決宣告書」(平理院, 1907. 5. 1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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