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대 화엄종(華嚴宗)의 사찰이며, 대구(大丘)의 공산(公山) 아래에 있었다.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창건과 폐사 시기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미리사(美理寺),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사(高麗史)』에는 미리사(美利寺)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대구군(大丘郡)의 속현(屬縣)인 해안현(解顔縣)조에 ‘일운 미리(一云 美里)’라고 기록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해안현에 있으며 ‘혹은 해안(解顔)을 미리(美理)’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었다. 의상의 ‘화엄십찰(華嚴十刹)’ 또는 ‘전교십찰(傳敎十刹)’ 중의 하나인데, 이것은 의상의 ‘십대제자(十代弟子)’와 병칭되고 있다.
927년(경애왕 4) 11월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경애왕은 견훤에게 죽었다. 왕건은 5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다가 견훤의 군사를 공산 남쪽 기슭 아래에 있는 미리사 앞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고려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이 전사하였고, 왕건은 혼자 몸만 빠져나오는 패배를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