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에 진골(眞骨)귀족들이 4계절마다 유흥(遊興)하는 별장(別莊) 형태의 저택이다.
신라의 전성시대에는 수도인 경주에 부유한 큰 저택인 금입택(金入宅)이 35개가 있었다. 그리고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은 구지택(仇知宅), 겨울은 가이택(加伊宅) 등 4계절마다 유흥하는 별장 형태의 저택도 있었다. 또한 제49대 헌강왕 때인 880년(헌강왕 6)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의 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으며, 추녀가 맞붙고 담장이 이어져 있어 노래와 풍류소리가 길에 가득 차 밤낮 그치지 않았다.
신라 하대에 중앙의 진골귀족들은 대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풍광이 수려한 곳에 35개의 금입택과 4개의 사절유택으로 상징되는 사치와 향락적인 생활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진골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에 대해 신라 조정에서는 834년에 사치를 금지하는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889년에는 나라의 창고가 텅 비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지방에 세금을 독촉하는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새롭게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