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思印)은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이나 사찰에 전하는 기록 등으로 볼 때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에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승려 주종장이다. 그는 많은 수의 보조 장인을 이끈 우두머리 장인[수장(首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 동종을 계승한 전통 양식 계열의 동종을 제작하였다. 동시대에 경상도 진주를 기반으로 경상도 고성과 전라도 순천 등 주로 남해안 일대에서 외래 양식 계열의 동종을 제작한 사장(私匠) 김애립(金愛立)과 쌍벽을 이룬 인물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작품이나 기록을 통해 사인의 활동 시기와 작품 경향을 살펴보면, 그는 1667년 포항 보경사 서운암동종(원 봉안처 경상북도 경산시 반룡사)을 다른 유파의 우두머리 장인으로 추정되는 태행(太行)과 함께 제작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사인은 태행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1670년에 문경 김룡사동종과 홍천 수타사동종을, 그리고 1674년에는 안성 청룡사동종을 각각 제작하였다. 사인이 1676년 함경도 대덕산 정광사에서 그 동안 함께 작업을 진행해 오던 태행을 배제하고 단독으로 대종, 중종, 금고 등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사인과 태행의 의 공동 작업은 1667년부터 1676년 이전까지만 지속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사인은 독자적인 유파를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683년에 보조 장인 5명을 이끌고 서울 화계사동종(원 봉안처 경상북도 영주시 희방사)을 제작하였고, 1686년에는 보조 장인 6명을 이끌고 양산 통도사동종 제작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688년에는 강화유수 윤지완(尹趾完, 1635~1718)의 명령으로 구 강화동종을 제작하였으며, 1701년에는 보조 장인 6명을 이끌고 의왕 청계사동종을 제작하였다.
사인은 1667년 포항 보경사 서운암동종을 제작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이 확인되지만, 이 동종은 다른 유파의 우두머리 장인으로 추정되는 태행과의 공동 작업으로 제작되었다. 사인은 태행과 1667년부터 1676년 이전까지는 공동 작업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의 작품 양식은 서울 화계사동종(1683년), 양산 통도사동종(1686년), 의왕 청계사동종(1701년)을 중심으로 살필 수 있다.
사인이 제작한 작품은 음통을 갖춘 단룡(單龍) 또는 음통이 없는 쌍룡(雙龍)으로 종뉴의 형태가 일정치는 않으나, 낮지만 편평한 천판(天板)과 종구(鍾口)가 시각적으로 벌어지는 종형(鍾形)은 꾸준히 표현되었다. 또 종신 상부와 하부에 부조된 원권(圓圈)의 범자(梵字)(육자대명왕진언 및 파지옥진언), 정사각형의 연곽(蓮廓), 구름 위에서 연꽃을 쥔 보살 입상,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 등의 패턴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종형과 종신을 장식한 도안들은 17세기 전·중반에 활동한 승려 주종장 원응(元應)이 제작한 안양 삼막사동종(1625년, 망실), 서산 부석사동종(1669년)과 동일 계열에 속한다. 따라서 사인은 원응의 계보를 직접 계승한 후배 장인으로 여겨진다.
한편, 서울 봉원사동종(1682년), 수원 팔달문동종(1687년) 등이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의 작품 양식은 이후 그의 보조 장인으로 함께 작업에 참여한 극련(克連)의 금강산 장안사동종(1708년, 망실), 조신(祖信)의 강화동종(1711년), 계일(戒日)의 순천 천은사동종(1715년), 여석(呂釋)의 공주 공주포교당동종(1741년)에서도 살펴볼 수 있어, 18세기에도 그의 작품 양식을 계승한 사인파(思印派)가 지속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