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비구 제작 동종 - 강화 동종은 1711년(숙종 37)에 사인의 계보를 계승한 조신이 제작한 종이다. 강화 동종은 강화읍성의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릴 때 사용하였다. 애초에 1688년(숙종 14)에 승려 사인이 제작했는데 파종되었다. 현재의 동종은 사인의 작품 양식을 철저히 계승하여 1711년에 조신이 제작한 것이다. 이 동종은 조선 후기 동종 가운데 가장 크고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을 띤다. 조선 후기 승려 주종장의 계보와 양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의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원래는 옛 고려궁터에 위치한 강화산성( 읍성)의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릴 때 사용하던 동종이다. 현재의 동종은 1688년( 숙종 14) 강화유수 윤지완(尹趾完, 16351718)이 주조한 것을 후에 부임한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 1711년 강화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다시 주조한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이 동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하며, 이후 고려궁터 진입로 옆의 김상용 순절비각 자리에 있던 것을 1977년 고려궁터를 보수하면서 궁터 안으로 옮겼으며, 1999년 12월에 지금의 장소로 이동하여 전시하였다고 한다.
강화동종은 종신에 “강희 50년 신묘 4월 일 강화정족산성조성예입 구종파철 중 2200근 첨입철 4320근 합 6520근 … 창시 유수윤공지완 … 유수민진원 … 개조 … 연화질 야풍5좌 구종 도화원 가선 총섭 사인 차조 도화원 가선 조신 극련 여석 혜석 계일 사익 수한 수민 묘잠 선등 자선 홍찬 삼익 월담(康熙五十年 辛卯四月日 江華井足山城造成曳入 舊鍾破鐵 重二千二百斤 添入鐵 四千三百二十斤 合六千五百二十斤 … 創始 留守尹公趾完 … 留守閔鎭遠 … 改造 … 緣化秩 冶風五坐 舊鍾都畵員 嘉善摠攝思印 次造都畵員嘉善祖信 克連 呂釋 惠釋 戒日 巳益 守汗 守敏 妙岑 先登 自先 弘粲 三益 月淡)”이라 양각된 주종기(鑄鍾記)가 남아 있어, 1711년 4월 옛 종[舊鍾, 1688년 제작]을 깨어 나온 철 2200근에 철물 4320근을 새롭게 더하여 강화 정족산성에서 조신의 주도 하에 극련(克連), 여석(呂釋), 혜석(惠釋), 계일(戒日), 사익(巳益), 수한(守汗), 수민(守敏), 묘잠(妙岑), 선등(先登), 자선(自先), 홍찬(弘粲), 삼익(三益), 월담(月淡) 등 모두 14명의 주종장이 참여하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동종은 전체 높이가 176㎝이고, 입지름이 145㎝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종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며,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 감돌고 있어 육중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더불어 종의 형태도 천판(天板)에서 종신(鍾身)까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고 있어 시각적으로 종구가 바깥으로 벌어져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낮고 편평한 천판 위에 두 마리 용이 서로의 등을 맞댄 모양의 종뉴(鍾鈕)가 부착되어 있고 음통(音筒)은 없다.
종신의 장식은 동종의 크기에 비해 단순한 구성을 보인다. 종신은 중앙에 돌출된 횡선(橫線)을 이용하여 크게 상하로 구획된다. 상단은 천판 바로 아래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을 장식하였으며, 그 아래 굵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9개의 만개한 연꽃을 장식한 정사각형 연곽(蓮廓) 4개를 배치하였다. 하단에는 동종 제작 시 후원과 소임을 맡은 인물들의 이름을 기재한 주종기가 양각 형태로 부착되어 있고, 그 아래 종구에는 상단과 같은 연화당초문으로 종신 전체를 둘렀다.
강화동종은 17세기 중 · 후반에 활발하게 활동한 승려 장인 사인(思印)의 계보를 계승한 사인파(思印派) 주종장 조신이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사인이 1683년 사인비구 제작 동종 - 서울 화계사 동종(보물 2000년 지정)을 제작할 때 5번째 주종장으로 참여하여 작업을 보조한 장인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동종은 낮고 편평하게 처리된 천판과 종구가 벌어진 형태에서 선배 장인인 사인의 작품 양식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다. 또한 쌍룡의 종뉴, 연곽 및 종구에 화려하게 장식된 연화당초문까지도 사인의 작품을 답습하였다. 그러나 크기가 커지면서 천판 위에 주물 흔적과 종신에 이중 횡선이 나타나며, 당시까지 일관되게 표현되던 보살 입상과 원권의 범자가 생략되는 차이를 보인다. 보살 입상과 범자를 생략한 이유는 동종이 성문의 시각을 알리는 시종(時鍾)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사실은 제작의 주체가 되는 인물들이 유수, 중군(中軍) 등 조정의 관리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강화동종은 그 동안 사인이 제작한 작품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동종의 제작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알려주는 주종기에는 작업을 주도한 우두머리 장인[수장(首匠)]을 “구종 도화원 가선 총섭 사인 차조 도화원 가선 조신”으로 명확히 구분하여 기재하고 있어, 파종한 옛 종(1688년)의 제작자가 사인이며, 강화동종은 조신에 의해 다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주종장 사인의 계보를 조신이 계승하였음을 의미하고 나아가 사인의 동종 양식을 계승하는 사인파가 18세기 전반부터 지속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증명해 준다.
강화동종에서 표현된, 낮지만 편평한 천판과 종구가 시각적으로 벌어지는 종형은 그의 선배 장인 사인이 제작한 서울 화계사동종(1683년), 양산 통도사동종(1686년), 의왕 청계사동종(1701년)에서 꾸준하게 나타나는 양식이다. 이러한 작품 양식은 극련의 금강산 장안사동종(1708년, 망실), 계일의 순천 천은사동종(1715년), 여석의 공주 공주포교당동종(1741년)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강화동종은 18세기에 들어와 사인의 양식을 직접 계승한 사인파가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조선 후기 승려 주종장의 계보와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