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7년(문무왕 17) 겨울 11월에 사찬(沙湌)의 관등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정(國政)을 물었으며, 아울러 급찬(汲湌) 김호유(金好儒)와 대사(大舍) 김흠길(金欽吉) 등도 보내었다. 신라에서는 송사(送使) 나말(奈末) 피진나(被珍那)와 부사(副使) 나말 호복(好福)이 김청평을 축자(筑紫)까지 호송하였으며, 같은 달에 숙신(肅愼)의 7명이 그를 따라 이르렀다. 이듬해 3월에 일본 정부는 김청평을 포함하여 13명을 서울로 불렀으며, 같은 해 8월에 신라로 돌아왔다. 이때 김청평은 일본으로 표류해 갔던 박자파(朴刺破) 등을 데리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