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불암창(佛巖倉)은 창원 마산창(馬山倉), 사천 통양창(通洋倉) 등과 함께 조선 초기 경상도 남부 지역에 위치하였던 조창이다. 불암창의 최초 설치 시기는 고려 중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조선 개창을 전후한 시기에 처음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불암창의 역할과 기능은 약 360여년 후인 1765년(영조 41) 밀양 삼랑창(三浪倉)의 설치로 계승되었다.
불암창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확인된다. 김해 불암창이 창원 마산창, 사천 통양창과 함께 1403년에 폐지되었다는 내용이다. 경상도 남부 지역의 세곡(稅穀)은 김해 불암창과 창원 마산창, 사천 통양창 등 세 곳에 나누어 모은 다음, 해로를 통하여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였는데, 수로가 험악하여 선박의 파손이 속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서는 1403년에 해로를 통한 경상도 세곡의 조운을 포기하고 충청도의 충주 경원창(慶源倉)을 통하여 경창으로 운반하도록 하였다. 이에 낙동강 하류 연안에 위치한 김해, 창원, 밀양, 양산, 함안, 초계, 창녕, 칠원, 진해, 의령 등의 고을에서는 낙동강 수로를 통하여 상주까지 세곡을 운반한 다음 육지로 문경새재를 넘어 경원창에 납부하였다.
김해 불암창이 언제부터 운영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불암창은 고려시대의 13조창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고려 초기부터 존재하지는 않았고 고려 중기나 고려 후기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려 말기에 왜적의 침략으로 인해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 일대가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해로를 통한 조운의 수송 자체가 매우 힘들었음을 고려하면, 고려 말기에는 불암창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왜적의 침략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조선 개창 전후 시기에 신설된 조창일 가능성도 있는데, 그 경우에는 불암창의 존속 시기가 1403년까지 불과 10~20년 내외에 지나지 않는다.
불암창의 위치는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 불암동 일대로 비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해 관아 동쪽 18리 지점에 둘레 265척의 석축으로 된 조전성(漕轉城)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불암창과 관련된 성곽으로 판단되지만, 현재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 외에도 불암창과 관련된 유적으로 특별히 알려진 것은 없다. 불암동은 서낙동강 하구의 서쪽 강변에 위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는 김해와 동래를 왕래할 때 불암진(佛巖津)과 양산 용당포(龍堂浦) 사이로 낙동강을 건넌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즉 불암창이 있던 불암진은 조창이 있었던 곳이지만, 낙동강 하류를 횡단하는 나루로서도 중요한 입지를 지닌 곳이었다. 지금도 불암동에는 남해고속도로, 김해와 부산 구포를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1403년 불암창이 폐지된 이후, 낙동강 하구 지역에는 오랫동안 조창이 운영되지 않다가 1765년에 밀양 삼랑창이 설치되었다. 삼랑창은 1760년에 설치된 진주 가산창(駕山倉), 창원 마산창과 아울러, 조선 후기 경상도 남부 지역에 운영된 이른바 3조창 중 1곳이었다. 경상도 남부 지역에 3개의 조창을 운영하는 구조는 불암창과 통양창, 마산창 등이 운영되던 1403년 이전에 이미 시행된 바 있었다. 따라서 옛 불암창의 수세(收稅) 구역은 조선 후기 삼랑창의 수세 구역과 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랑창의 수세 구역은 밀양, 현풍, 창녕, 영산, 김해, 양산 등 6개 고을인데, 불암창의 수세 구역에는 이 6개 고을 외에 동래와 언양, 울산 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불암창은 조선 초기 낙동강 하구 지역에 위치했던 조창이다. 1760년대 이후 경상도 남부 지역에 3개의 조창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불암창이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도 경상도 남부 해안 지대에 3개의 조창이 운영된 바 있었다. 불암창은 그 중 하나에 해당하였다. 입지상 불암창은 조선 후기 경상도 남부 지역의 3조창 중 삼랑창이 담당했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