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조선은 서양과 일본의 문호 개방 요구에 맞서기 위해 군기와 갑주(甲冑)를 정비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총탄을 막기 위해 여러 겹의 면포와 솜을 교대로 겹쳐서 만드는 새로운 갑옷을 개발하였다. 성능 실험을 반복한 결과 13겹부터 화살이 갑옷을 꿰뚫지 못하였으나, 갑옷을 입고 군사 훈련을 해 보니 포군(砲軍)이 더위를 견디지 못했고 물에 젖거나 불이 붙었을 때에도 문제가 있었다.
성능 실험을 거쳐서 완성된 갑옷은 현재까지 유물로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면제갑옷 유물은 흥선대원군의 갑옷 개발 기록과는 달리 솜이 없이 면포, 즉 무명만 30겹을 겹쳐서 만든 것이다. 옷감 여러 겹을 겹쳐서 탄환의 관통력을 저하시키는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무명 수십 겹을 겹치면 굉장히 무거웠기 때문에 소매 없이 몸통 부분만 가리는 배갑(背甲) 형태로 제작되었다. 둥근 목둘레에 깃은 달려 있지 않고, 앞의 길이가 길고 뒤의 길이가 짧으며, 왼쪽 어깨는 연결되어 있고 오른쪽 어깨만 트여 있어 매듭단추로 여미도록 하였다. 갑옷의 두께로 인해 옆선을 바느질하여 앞뒤를 연결할 수 없었으므로 겨드랑이 아래를 전부 트고 대신 좌우 모두 2쌍씩 끈을 달아서 묶어 입었다. 앞면과 뒷면의 형태가 달라서 앞은 뒤보다 6~7㎝ 가량 길고, 뒷면에만 양쪽으로 삼각형 무가 달려 있다. 겉감과 안감은 사이에 겹친 무명에 비해 밀도가 높은 직물을 사용하였고, 겉감과 가장자리를 두른 선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황토색으로 염색하였다.
면제갑옷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인문(印紋)을 들 수 있다. 인문의 위치를 보면 길이가 긴 앞면은 아래쪽 좌우에, 길이가 짧은 뒷면은 위쪽과 아래쪽 좌우에 각 1개씩 총 6개의 원형 부적 문양이 찍혀 있다. 조선 후기 갑옷 유물 중에는 무명 위에 검은색이나 붉은색으로 연꽃[蓮花], 만자(卍字), 부적 문양을 찍은 경우가 자주 보인다. 무늬가 있는 고급 견직물을 사용할 수 없었던 하급 군사들은 나무판에 무늬를 새겨서 평직의 면직물인 무명 위에 도장을 찍었다. 국내와 해외에 소장된 면제갑주 유물을 살펴보면, 투구의 감투 부분과 드림, 갑옷의 앞과 뒤, 요대의 앞과 뒤, 가슴 가리개에 찍힌 문양은 불교와 도교의 주술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부적이다. 문양은 대표적인 불교적 주문(呪文)이자 도교적 수행 방법인 옴마니반메훔(唵麽抳鉢銘吽: Om Mani Padme Hum), 도교의 방위별 명산(名山) 다섯 가지로 장수 · 보호 · 회복을 의미하는 오악진형도(五嶽眞形圖), 기문둔갑(奇門遁甲)에서 사용되는 구성팔문부(九星八門符)로 이루어져 있다.
갑옷의 안쪽에는 착용자로 추정되는 이름의 묵서(墨書)가 남아 있다. 뒷면의 오른쪽 아래 부분 안감에 ‘孔君玉(공군옥)’이라는 먹글씨가 세로로 쓰여 있다.
조선시대 삼승포(三升布)나 면포로 만든 갑옷은 하급 군사들의 갑옷으로 면갑(綿甲) · 목면갑의(木綿甲衣) · 목면갑주(木綿甲冑) 등의 명칭으로 조선 중기 때부터 착용되어 왔으나 19세기 후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며 서구 열강의 총을 막기 위해 형태와 구조가 변화되었다. 면제갑옷은 특히 19세기 초 『만기요람(萬機要覽)』, 『융원필비(戎垣必備)』에서 보이는 목면피갑(木綿皮甲), 피갑(皮甲)과 관련성이 높다. 목면피갑은 목면, 즉 무명으로 옷을 제작하고 가죽 갑찰을 두정으로 고정한 갑옷으로, 서양 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목면피갑 위에 부적 문양을 찍어서 심리적 보호막을 형성하거나, 가죽갑찰을 철갑찰로 대체하거나, 면포를 수십 겹 겹쳐 면제갑옷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에 「육군복장규칙(陸軍服裝規則)」이 반포되면서 서양의 양복형 군복이 전통 복식을 대신하였다. 화약 무기의 발전으로 인한 효용성 상실, 근대화와 서구화로 인한 제도적 개혁으로 인해 면제갑옷을 포함한 조선의 갑주는 점차 쇠퇴하고 소멸하게 되었다.
현재 국내 면제갑옷 유물은 1점만 남아 있는 반면 해외 유물들은 투구, 갑옷, 부속 복식이 함께 갖추어져 있고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어서 착용 방식과 갑주 제도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경매, 구입, 기증의 경로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해외의 여러 박물관에 소장된 관련 유물을 보면 동일한 재질로 만든 투구, 갑옷, 넓은 허리띠, 가슴 가리개가 일습을 이루고 있다. 투구와 허리띠, 가슴 가리개 역시 면포 여러 겹을 겹쳐서 만들었으며 투구 드림은 옷감 사이에 솜을 넣은 후 규칙적인 간격으로 실로 고정하였다.
면제갑옷은 공격 무기 변화에 따른 방어구의 대응과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갑옷이며, 조선 후기 하급 군사가 착용했던 갑옷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유물로서 군사사 및 복식사에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국내외 관련 유물은 구조, 형태, 크기, 제작 방식, 재료, 색상, 문양의 종류와 위치, 안쪽에 착용자 이름으로 추정되는 묵서가 남겨진 점까지도 일치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면제갑옷은 일정한 제도가 정해져 있어서 규정에 맞추어 제작되었고, 문헌과 사진 자료를 종합하여 볼 때 국가 기관의 주도 하에 다량으로 제작되어 실전에 착용했음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