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후기에 왕실의 생활 재료를 조달하기 위해 주18이 설치되었으며 궁방 중에서 1사 4궁이 규모가 크고 비중이 컸다. 명례궁은 그중 하나이며, 1623년경에 인목 주1의 주4으로 설치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주2에 속하여 궁중의 연회나 주3를 위한 식재료를 조달하였다.
조선왕조 후기에 왕실 재정의 일부로 왕실의 생활 재료를 조달하기 위해 1사 7궁을 설치하였으며 이중 내탕의 기능을 한 것은 1사 4궁( 내수사(內需司), 수진궁(壽進宮), 명례궁, 용동궁(龍洞宮), 어의궁(於義宮))이었다. 내수사는 주5에 속했으며 4궁은 소속의 변동이 있었다. 명례궁은 1623년경 인목 대비의 내탕으로 설치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중궁전에 속하여 궁중의 주6과 주7에 필요한 각종 식재료를 조달하는 기능을 하였다. 위치는 서부 황화방(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덕수궁(德壽宮) 내)이었다. 주9, 주8, 장무, 서원(書員)의 직책이 있었으며 입출고를 기록한 『명례궁봉상책』, 『명례궁상하책』과 시재(時在)를 기록한 『명례궁회계책』이 남아 있다.
명례궁의 수입은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이 정기적으로 상납하는 주10, 명례궁 소유의 궁방전(宮房田) 지대와 노비 신공(身貢), 국왕과 왕비의 하사금인 내하(內下), 기타로 구성되어 있었다. 입고는 쌀, 콩, 동전 등 20여 종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동전으로 환산하면 18세기 말에는 궁방전 지대, 19세기 중엽에는 공상, 19세기 말에는 내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1882년부터 발행된 당오전(當五錢)의 상당 부분이 내하 형식으로 들어왔다.
명례궁의 지출은 대부분 궁중에서 자주 행해진 제사, 연회, 다례, 주11에 쓰이는 식재료의 구매가 차지하였다. 내전(內殿)의 주12이 물품과 수량을 발주하는 주13를 차지에게 내리면 차지는 담당 겸역(兼役)에게 조달을 명하고 겸역은 상인에게 상납을 명하였다. 차지는 구매 물품의 가격을 주14 상인에게 통보한다. 가격은 대체로 시세를 반영하지만, 대전가(代錢價)인 경우도 있었다. 대금은 납품 후에 주기적으로 한꺼번에 처리하였으나 왕실의 쓰임새가 커지면서 시재가 감소하였고 1870년대부터 적자가 누적되면서 미지급금이 증가하였다.
1897년에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돌아온 고종이 주15으로 거처를 옮겨 법궁으로 확대 주17 명례궁의 기능이 약해졌다. 건물은 남아있었으나 1904년의 덕수궁(경운궁)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명례궁을 비롯한 궁방은 1907년에 통감부(統監府)의 황실 재산 정리 과정을 거쳐 1909년에 제도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왕실 재정은 궁부 일체의 원리에 따라 이뤄지는 공적 영역과 왕실의 사적 재산에 의해 운영되는 사적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례궁을 비롯한 궁방은 사적 영역에 속한다. 명례궁 분석을 통해 왕실 재정의 운영 실태와 함께 근대적 시장과 대비되는 서울 상업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