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월 28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심천면(深川面) 초강리(草江里)에서 태어났다.
빈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일을 도우며 경제적으로 어렵게 성장하였다. 1934년 2월 대전으로 이주하여 군시제사주식회사(郡是製絲株式會社) 대전공장의 여공으로 취업하였다. 그가 다니던 군시 공장은 일본 대재벌 미쓰이[三井] 계열의 회사로서, 일제 수탈과 전쟁 협력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1929년 4월과 1932년 11월에는 동맹파업이 일어난 바 있으며,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던 곳이었다. 1938년 4월부터는 대전부 본정 2정목[현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에 있는 백화점 내 양만기(梁萬技) 상점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38년 10월 군시제사회사 대전공장 여자 기숙사에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정삼례(鄭三禮), 김추현(金秋鉉), 한동임(韓東任) 등에게 “일본이 현재 전쟁을 하고 있으나 자금이 적어 불리한 데 비해, 중국과 러시아에는 돈이 많다. 또 자동차와 비행기 등도 일본보다 많기 때문에 장기전에 이르면 일본은 물자 부족으로 인해서 패전한다”며 전쟁 상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였다. 11월에도 정삼례와 김추현에게 중국과의 전쟁에서 결국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발언을 이어갔다. 1939년 3월에는 대전부 천정(泉町)[현 대전광역시 동구 천동] 인단산 아래 철도 선로에서 정삼례, 김추현, 안운직(安運直), 백정옥(白貞玉)에게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발언을 다시 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박재복은 물자 및 자금이 부족한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는 의사를 주변 사람들에게 거듭 알리며 독립에 대한 전망을 밝혀나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그의 발언 경위 등을 탐지한 후, 박재복이 불온한 ‘조언비어(造言飛語)’를 퍼트렸다며 체포하였다. 일본 사법부는 박재복의 발언에 대해, 일본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육군형법과 해군형법 위반 혐의를 따졌다. 결국 육군형법 위반을 죄목으로 1941년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금고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