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드 버치는 미군정청 정치고문단에서 활동한 미군 장교이다. 1945년 12월 15일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까지 미군정청 정치고문단에서 활동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자문 역할을 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1976년 사망하였으며, 그가 가지고 있던 문서들이 하버드옌칭도서관에 기증되었다.
1910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1926년 홀리크로스대학에 입학하여 역사와 사회학을 전공하고 1930년 졸업하였다. 이후 하버드대학교 법학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주 아크론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41년 아크론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대학원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1944년 육군군정부대에 입대하였다. 1945년 6월 30일 텍사스 휴스턴에서 육군군정부대를 수료하고 장교로 임관하였다.
1945년 12월15일 한국의 미군정에 배치되었다. 미군정에 배치된 직후, 남조선대한국민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을 돕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굿펠로우[Preston Goodfellow]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보조 역할을 한 후, 1946년 중반부터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처[Bureau of Public Information]의 정치 분석가로 활동하였다.
1946년 10월부터는 좌우합작위원회를 돕는 역할을 하였다. 제1차 좌우합작위원회가 버치의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개최되었으며, 이후 덕수궁에서 개최될 때도 항상 버치가 배석하거나 회의 내용을 전달받아 미군정에 전달하였다.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이때 김두봉을 만나려고 하였지만, 만나지 못하였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을 때 한국어로 조사를 읽었으며, 여운형 사후에도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 김규식을 계속 지원하였다. 1947년 말에는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국민주당과 함께 의원내각제 정부를 추진하였지만,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장덕수가 1948년 12월 암살되면서 포기하였다.
한국에 근무하면서 김규식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었고, 여운형을 비롯한 많은 중도파 정치인들도 버치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가톨릭 신자여서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가톨릭계 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반면, 좌우합작위원회를 도와주면서 이승만 계열의 정치인들과는 갈등을 빚었다. 1947년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할 때, 그가 귀국하지 못하도록 하는 편지를 워싱턴 D.C.의 국무성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고 38선 이남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와 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더 이상의 활동을 그만두고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1949년 이후 한국 내에서 혼란이 계속되면서 한국의 상황에 대한 문의가 그에게 많이 갔으며, 버치 본인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에 대해 많은 강연을 하였다. 1976년 사망하였다.
버치가 죽은 후 그가 갖고 있었던 문서들을 가족들이 하버드대학교에 기부하였다. 가족들은 하버드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기증하고자 하였지만, 카터 에컬트 교수의 설득으로 하버드옌칭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그의 문서들은 현재 귀중문서로 분류, 보관되어 있다.
1946년 12월 육군 표창 메달[The Army Commendation Ribbon]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