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하지 (John Reed Hodge)

현대사
인물
주한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청 사령관을 역임한 군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3년
사망 연도
1963년
출생지
미국 일리노이주 골콘다
주요 경력
주한 미군정청 사령관
대표 상훈
퍼플허트 훈장
관련 사건
5·10총선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존 하지는 주한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청 사령관을 역임한 군인이다. 1893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으며, 대학 졸업 후 1917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24군단 군단장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지휘하였으며, 일본이 패망한 직후 주한 미군정청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 사령관으로 활동하다가, 정부 수립 직후 군정을 해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의
주한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청 사령관을 역임한 군인.
인적사항

1893년 6월12일 미국 일리노이주 골콘다에서 태어났다.

주요 활동

미시시피대학 졸업 후 육군 장교를 지원하여 1917년 10월 소위로 임관하였다. 직후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21년부터 미시시피 주립대학의 군사학 교수로 4년간 근무하였다. 1926년에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까지 하와이의 제29 보병연대와 뉴욕의 제18 보병연대 소속 장교로 활약하였다. 1935년 소령으로 진급하였고, 1936년까지 육군 화학전학교, 육군 지휘참모대학, 육군 전쟁대학, 육군 항공대 전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41년 초까지 워싱턴에서 근무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제7군단 참모장으로 승진하고 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1942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임시 준장이 되었다. 1944년 필리핀 레이테섬 전투와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동년 6월 중장으로 진급하고 제24군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9일, 38선 이남에 주둔한 주한미군의 사령관 겸 미군정청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군이 상륙하기 이전에 조직된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정부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임을 명확히 하였다. 미군정청 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야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부의 지시를 잘 따르는 군인 정신을 보여주었다. 미군정은 미국 국무성의 지시를 받으면서 일본에 있는 태평양사령부와도 연결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양자의 지시를 모두 따르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점령지 사령관으로서 국무성의 지시를 우선적으로 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는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결정서가 발표되자, 여기에 규정된 조선임시민주정부의 수립과 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 그리고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 실시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인들이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으며, 이는 즉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조선임시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해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조직하였고, 동년 3월부터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김구를 중심으로 한 보수 우익 세력들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으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자,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지원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 김구와 대립하였다. 이와 함께 1946년 12월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1947년 초에는 남조선과도정부를 수립하여, 한국인들에게 정부 조직을 이양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또한 1946년의 정판사 위폐사건9월 총파업을 계기로 좌익 세력의 활동을 불법화하였다.

1947년에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지자, 워싱턴의 지시를 받아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유엔의 결의에 따라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38선 이남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조직되어 내한하자,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통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는 정부 수립 직후 대한민국 정부와 행정 이양 협정을 체결하여 미군정의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조직을 해체하였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포트 브래그로 돌아가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제5군단장을 맡았다. 1952년 미 육군 지상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퇴역하였다. 1963년 70세로 워싱턴 D.C.에서 사망하였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상훈과 추모

미국 육군 3등 공로훈장[Distinguished Service Medal], 미국 해군 공로훈장, 공로훈장[Legion of Merit], 공군훈장[Air Medal], 퍼플 하트 훈장[Purple Heart] 등을 받았다.

참고문헌

단행본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해방과 분단 체제의 출현 1945-1947』(김범 옮김, 글항아리, 2023)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중심, 2003)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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