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8월 1일 미국 일리노이주 칼라일에서 태어났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방문했을 때 웨스트포인트 생도들과 군인들의 훈련 모습을 보고 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군에 들어갔고, 1922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를 졸업하였다.
1923년 10월 18일 소위로 임관해 10년 넘게 중위로 근무하다가, 1931년에 포트 베닝 보병학교에 들어갔다. 1932년 태평양 연안으로 돌아와 30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임무는 민간인 보호 구역에서의 일이었으며, 해크모어 캠프의 지휘관으로 근무하였다. 임무 해제 후에는 포트 리븐워스의 지휘참모대학을 다녔고, 그 후 2년간 하와이 오아후의 부대에서 근무하였다. 1936년 대위로 진급하였고, 1940년에 소령이 되었다. 1943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44보병사단에서 사단장으로 복무하였다. 1944년에는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에서 복무하며 독일 제19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미군정청의 2대 군정장관이었던 러치가 병사하면서 1947년 10월 후임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어 한국에 왔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한국 정부에 통치권을 넘기기 전까지 경찰 업무, 세금 징수, 식량 배급과 같은 업무를 포함해 한국인을 위한 기본적인 생계유지 관련 활동을 하였다. 1948년 남한 단독 선거를 앞두고 선거 독려를 위한 순회 연설을 진행하였다. 선거 실시에 필요한 세금 징수와 선거위원회 설치 작업도 담당하였다. 그해 8월까지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일본 규슈[九州]의 고쿠라[小倉]로 근무지를 옮겨 생활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제24보병사단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1950년 7월 3일에 한국에 도착해 대전에 본부를 세우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의 명령에 따라 대전을 사수하기 위한 임무에 돌입하였다. 해당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의 탱크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후퇴할 때 북한군 포로로 붙잡혔으며, 1953년 9월 4일 석방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고, 군사적 및 민간적인 명예를 누렸다. 1955년 10월 31일에 군을 은퇴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1981년 8월 24일 사망하였다. 부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