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5월 22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커머셜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대학교에 진학하여 저널리즘을 공부하였다. 『브루클린 타임스』에서 지역 기자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 지역 에디터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한때 멕시코 국경에서 전쟁 특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소위로 복무하였다. 전쟁 후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뉴욕 타임스의 발행인을 담당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복귀하였으며,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사무국] 소속으로 세계 각지에 게릴라 운동을 지원하였다.
해방 직후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초빙돼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20일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도 미국 측 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굿펠로우는 OSS 출신 중에서도 전후 미국의 남한 점령 정책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우익 세력의 통합체인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6년 5월 남한에서의 업무 종료를 앞두고 밝힌 회고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자치정부를 수립하기에 충분히 준비돼 있다. 소련 대표단이 연합국 공동 위원회에 복귀하지 않으면 미국이 남한에서 별도의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굿펠로우는 미군정 점령 통치가 종료된 후에도 이승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등 한국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948년 11월 14일, 2~3주 체류 일정으로 입국해 공산주의 사태를 비롯하여 미곡 수집 경과와 경제 필수 물자 관련 정황을 확인하고 조사 일정을 계획하였다. 1949년에는 한국 정부의 선박 구입 문제와 관련하여 자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내한하였다. 이후로도 이승만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 정치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1973년 9월 5일 워싱턴 D.C.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