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공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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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九城)은 1107년(예종 2) 12월에서 1109년(예종 4) 7월 사이에 윤관이 별무반을 동원하여 고려 동북쪽의 변경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축성한 성곽이다. 1108년(예종 3) 3월 경진일 무렵에 구축된 9성은 영주, 웅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 평융진이다. 1109년 7월 신유일부터 순차적으로 철수한 9성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의주, 공험진, 평융진이 빠져 있고 숭녕진, 진양진, 선화진이 추가되어 있다.
구성 (九城)
구성(九城)은 1107년(예종 2) 12월에서 1109년(예종 4) 7월 사이에 윤관이 별무반을 동원하여 고려 동북쪽의 변경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축성한 성곽이다. 1108년(예종 3) 3월 경진일 무렵에 구축된 9성은 영주, 웅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 평융진이다. 1109년 7월 신유일부터 순차적으로 철수한 9성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의주, 공험진, 평융진이 빠져 있고 숭녕진, 진양진, 선화진이 추가되어 있다.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는 1108년(예종 3) 2월, 9성을 개척한 윤관이 9성의 가장 북쪽에 있는 공험진 선춘령에 세운 국경 경계비이다. 건립 시기는 1108년 2월로 보이지만, 정확한 위치, 비문의 내용은 불명이다. 비석 4면에는 모두 글자가 있었지만, 언제인가 오랑캐들이 글자를 뭉개 버렸다고 한다. 현재 실물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정계비가 윤관 9성의 축성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고려정계비 (高麗定界碑)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는 1108년(예종 3) 2월, 9성을 개척한 윤관이 9성의 가장 북쪽에 있는 공험진 선춘령에 세운 국경 경계비이다. 건립 시기는 1108년 2월로 보이지만, 정확한 위치, 비문의 내용은 불명이다. 비석 4면에는 모두 글자가 있었지만, 언제인가 오랑캐들이 글자를 뭉개 버렸다고 한다. 현재 실물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정계비가 윤관 9성의 축성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선춘령(先春嶺)은 고려시대에 윤관(尹瓘)이 동북 변경 지역을 개척하고 비(碑)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고개이다. 1108년(예종 3) 1월경에 공험진을 축성하였으며, 같은 해 2월 13일(갑오일)에는 방어사를 두었다. 그리고 27일(무신일)에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윤관이 비를 세운 지역이 공험진의 선춘령이었고, 선춘령은 두만강 이북 700리에 위치하였다는 지리 인식은 조선 전기 기록에서 확인된다.
선춘령 (先春嶺)
선춘령(先春嶺)은 고려시대에 윤관(尹瓘)이 동북 변경 지역을 개척하고 비(碑)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고개이다. 1108년(예종 3) 1월경에 공험진을 축성하였으며, 같은 해 2월 13일(갑오일)에는 방어사를 두었다. 그리고 27일(무신일)에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윤관이 비를 세운 지역이 공험진의 선춘령이었고, 선춘령은 두만강 이북 700리에 위치하였다는 지리 인식은 조선 전기 기록에서 확인된다.
여진정벌은 고려의 동북면에 거주하던 동여진을 토벌한 전쟁이다. 여진족은 고려의 동북면에서 농경이나 어업에 종사하였는데, 1104년 여진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완안부 세력이 남하하여 정주를 침범하였다. 임간과 윤관 등이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였다가 실패하고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이후 고려는 별무반을 편성하여 군사를 양성하였고, 1107년에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의 결과로 북방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완안부의 약탈과 반환 요청이 계속되자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여진정벌 (女眞征伐)
여진정벌은 고려의 동북면에 거주하던 동여진을 토벌한 전쟁이다. 여진족은 고려의 동북면에서 농경이나 어업에 종사하였는데, 1104년 여진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완안부 세력이 남하하여 정주를 침범하였다. 임간과 윤관 등이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였다가 실패하고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이후 고려는 별무반을 편성하여 군사를 양성하였고, 1107년에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의 결과로 북방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완안부의 약탈과 반환 요청이 계속되자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