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아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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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은 삼국시대 백제에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학자이다. 일본의 『고사기』에는 ‘와니기시[和邇吉師]’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왕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는 근초고왕 때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천자문』이 편찬된 시기 등을 근거로 윤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아신왕 말기에 태자를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동맹을 맺고 우호관계를 성립하였는데, 그 답례로 인적자원을 보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백제의 오경박사 등이 왜국으로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전수하여 일본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왕인 (王仁)
왕인은 삼국시대 백제에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학자이다. 일본의 『고사기』에는 ‘와니기시[和邇吉師]’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왕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는 근초고왕 때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천자문』이 편찬된 시기 등을 근거로 윤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아신왕 말기에 태자를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동맹을 맺고 우호관계를 성립하였는데, 그 답례로 인적자원을 보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백제의 오경박사 등이 왜국으로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전수하여 일본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노객은 고구려 왕이 백제나 신라 왕을 칭하거나 고구려 신하가 왕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다. 「광개토왕비문」, 「모두루묘지」, 「충주고구려비」에 나온다. 광개토왕비문과 충주고구려비에 나온 노객은 백제 왕과 신라 왕을 뜻한다. 모두루묘지에 나온 노객은 고구려의 관료인 모두루가 왕에 대해 자신을 낮춰 표현한 것이다. 노객은 본래 속민이나 노예를 뜻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신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고구려가 주변국에 비해 우월하다는 의식 곧, 고구려적 천하관에 따라 사용된 것이다.
노객 (奴客)
노객은 고구려 왕이 백제나 신라 왕을 칭하거나 고구려 신하가 왕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다. 「광개토왕비문」, 「모두루묘지」, 「충주고구려비」에 나온다. 광개토왕비문과 충주고구려비에 나온 노객은 백제 왕과 신라 왕을 뜻한다. 모두루묘지에 나온 노객은 고구려의 관료인 모두루가 왕에 대해 자신을 낮춰 표현한 것이다. 노객은 본래 속민이나 노예를 뜻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신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고구려가 주변국에 비해 우월하다는 의식 곧, 고구려적 천하관에 따라 사용된 것이다.
전지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1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05~420년이다. 태자시절 왜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부왕 아신왕이 죽자 귀국하던 중 아신왕의 막내아들 설례가 왕위를 찬탈했다. 귀족 세력인 해씨 세력과 그 지지 세력에 의해 설례가 진압되고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치구도가 변하여 해씨 세력이 크게 부상하고 진씨 세력이 퇴조했다.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좌평을 설치했으며 왕족을 상좌평에 임명함으로써 권력기반을 안정시켰다. 대외관계에서는 왜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의 동진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전지왕 (腆支王)
전지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1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05~420년이다. 태자시절 왜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부왕 아신왕이 죽자 귀국하던 중 아신왕의 막내아들 설례가 왕위를 찬탈했다. 귀족 세력인 해씨 세력과 그 지지 세력에 의해 설례가 진압되고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치구도가 변하여 해씨 세력이 크게 부상하고 진씨 세력이 퇴조했다.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좌평을 설치했으며 왕족을 상좌평에 임명함으로써 권력기반을 안정시켰다. 대외관계에서는 왜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의 동진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팔수부인은 삼국시대 5세기 때 백제 전지왕의 왕비이며, 구이신왕의 어머니이다. 출신에 대해선 해씨, 진씨라는 설과 백제인이 아닌 왜계라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왕모와 목만치가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농단하였다고 한다.
팔수부인 (八須夫人)
팔수부인은 삼국시대 5세기 때 백제 전지왕의 왕비이며, 구이신왕의 어머니이다. 출신에 대해선 해씨, 진씨라는 설과 백제인이 아닌 왜계라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왕모와 목만치가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농단하였다고 한다.
관미령전투(關彌嶺戰鬪)는 관미령에서 벌어진 백제와 말갈 · 고구려와의 전투이다.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 오두산성, 예성강 중류 남안, 강화 교동도의 화개산성, 강화 하음산성, 황해도 개풍군 백마산 부근으로 보는 설 등이 있으나, 이 중 오두산성으로 보는 설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미령과 관미성은 고구려의 남하로이자 백제 북방의 요충지였고,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관미령전투 (關彌嶺戰鬪)
관미령전투(關彌嶺戰鬪)는 관미령에서 벌어진 백제와 말갈 · 고구려와의 전투이다.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 오두산성, 예성강 중류 남안, 강화 교동도의 화개산성, 강화 하음산성, 황해도 개풍군 백마산 부근으로 보는 설 등이 있으나, 이 중 오두산성으로 보는 설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미령과 관미성은 고구려의 남하로이자 백제 북방의 요충지였고,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삼국시대 백제 제15대 침류왕의 서자인 왕자.
부여홍 (扶餘洪)
삼국시대 백제 제15대 침류왕의 서자인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