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양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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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지도」는 1463년 조선 전기 문신 정척과 양성지가 조선의 지형 및 국방과 인문지리 정보를 담아 제작한 지도이다. 실물은 전하지 않고 문헌 기록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팔도지도」와 일본 도요문고의 「조선회도」가 이 지도로 추정된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개선된 모습과 산맥의 흐름이 강조된 점이 특징이다. 도로와 부·군·현, 병영 등의 인문지리적 정보와 각 지역에서 수도까지의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조선의 국방과 지리적 이해를 반영한 중요한 자료이다.
동국지도 (東國地圖)
「동국지도」는 1463년 조선 전기 문신 정척과 양성지가 조선의 지형 및 국방과 인문지리 정보를 담아 제작한 지도이다. 실물은 전하지 않고 문헌 기록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팔도지도」와 일본 도요문고의 「조선회도」가 이 지도로 추정된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개선된 모습과 산맥의 흐름이 강조된 점이 특징이다. 도로와 부·군·현, 병영 등의 인문지리적 정보와 각 지역에서 수도까지의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조선의 국방과 지리적 이해를 반영한 중요한 자료이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양성지가 건립한 팔작지붕 형태의 누정.
봉황정 (鳳凰亭)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양성지가 건립한 팔작지붕 형태의 누정.
조선 전기에, 집현전정사, 박사, 이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심신 (沈愼)
조선 전기에, 집현전정사, 박사, 이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성주사고는 조선 전기에 실록과 같은, 국가 중요 사적을 보관 · 관리하던 외사고의 하나이다. 이 사고는 1439년(세종 21) 7월 춘추관이 올린 외사고 확충 계획에 따라 설치되었으며, 춘추관 내사고와 함께 외사고인 충주 · 전주 · 성주의 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 체계가 성립되었다. 성주사고는 1538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보관하고 있던 실록과 함께 파괴 · 소실되었다. 전란 이후 외사고가 산간의 오지나 도서 지역으로 이설됨에 따라 성주사고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사고는 모두 복구되지 못하였다.
성주사고 (星州史庫)
성주사고는 조선 전기에 실록과 같은, 국가 중요 사적을 보관 · 관리하던 외사고의 하나이다. 이 사고는 1439년(세종 21) 7월 춘추관이 올린 외사고 확충 계획에 따라 설치되었으며, 춘추관 내사고와 함께 외사고인 충주 · 전주 · 성주의 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 체계가 성립되었다. 성주사고는 1538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보관하고 있던 실록과 함께 파괴 · 소실되었다. 전란 이후 외사고가 산간의 오지나 도서 지역으로 이설됨에 따라 성주사고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사고는 모두 복구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정대부, 분승지, 평산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양응락 (梁應洛)
조선 후기의, 통정대부, 분승지, 평산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전기 문신 양성지·권람이 『고려사전문』의 불공정한 서술을 수정하여 편찬한 역사서.
여사대전 (麗史大全)
조선전기 문신 양성지·권람이 『고려사전문』의 불공정한 서술을 수정하여 편찬한 역사서.
흉배는 조선시대 백관의 흑단령과 반가 여성의 예복에 덧붙이던 품계 표식이다. 1454년(단종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이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세조 대 이후 흑단령에만 사용하였다. 영조 대에는 9품 당하관까지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고 정조 말기에는 문관의 쌍학흉배와 단학흉배는 물론, 무관의 쌍호흉배와 단호흉배도 정착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에는 반가 여성들도 원삼에 남자와 같은 종류의 흉배를 사용하였으나 17세기 이후 18세기 중기까지 원삼과 당의에 모란흉배나 수자흉배, 봉흉배를 사용하였다.
흉배 (胸背)
흉배는 조선시대 백관의 흑단령과 반가 여성의 예복에 덧붙이던 품계 표식이다. 1454년(단종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이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세조 대 이후 흑단령에만 사용하였다. 영조 대에는 9품 당하관까지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고 정조 말기에는 문관의 쌍학흉배와 단학흉배는 물론, 무관의 쌍호흉배와 단호흉배도 정착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에는 반가 여성들도 원삼에 남자와 같은 종류의 흉배를 사용하였으나 17세기 이후 18세기 중기까지 원삼과 당의에 모란흉배나 수자흉배, 봉흉배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