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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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언론인, 박은식의 설·의·기·전 등을 수록한 문집.
겸곡문고 (謙谷文稿)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언론인, 박은식의 설·의·기·전 등을 수록한 문집.
『무문헌문집』은 조선 후기에 개항기,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학자 이철후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64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6권 3책의 석인본으로, 표제, 권수제, 판심제 모두 동일하게 ‘무문헌문집(無聞軒文集)’이다.
무문헌문집 (無聞軒文集)
『무문헌문집』은 조선 후기에 개항기,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학자 이철후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64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6권 3책의 석인본으로, 표제, 권수제, 판심제 모두 동일하게 ‘무문헌문집(無聞軒文集)’이다.
유희는 광대들이 재담과 몸짓으로 유학자들을 비판하거나 부패한 관리를 풍자하는 소극(笑劇)이다. 유사한 용어인 ‘우희(優戲)’는 유학자만이 아니라, 부패한 양반 관리를 비판하거나, 현실의 비정상적 인물을 흉내낸다는 점에서 대상이 좀더 포괄적이다. ‘궐희(闕戱)’는 성균관 유생들이 공자를 모시고 벌이는 비판적 성격의 관원 놀이로 놀이 주체가 유생이란 점이 다르며, ‘조희(調戲)’는 가볍게 희롱하는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유희는 하층 광대인 우인들이 상층을 희롱하는 연극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희 (儒戱)
유희는 광대들이 재담과 몸짓으로 유학자들을 비판하거나 부패한 관리를 풍자하는 소극(笑劇)이다. 유사한 용어인 ‘우희(優戲)’는 유학자만이 아니라, 부패한 양반 관리를 비판하거나, 현실의 비정상적 인물을 흉내낸다는 점에서 대상이 좀더 포괄적이다. ‘궐희(闕戱)’는 성균관 유생들이 공자를 모시고 벌이는 비판적 성격의 관원 놀이로 놀이 주체가 유생이란 점이 다르며, ‘조희(調戲)’는 가볍게 희롱하는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유희는 하층 광대인 우인들이 상층을 희롱하는 연극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복(儒服)은 조선시대 때 유생이나 유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입었던 의복의 총칭이다. 유학자들이 입는 복장 역시 유복이라고 칭하였는데 대표적인 복장이 심의(深衣)이다. 따라서 유생들이 입던 치포건과 청금, 홍단령과 흑단령, 연건과 난삼을 비롯하여 유학자들이 착용하던 심의 외에 조선 후기 사대부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도포(道袍), 학창의(鶴氅衣), 야복(野服) 등도 유복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유복 (儒服)
유복(儒服)은 조선시대 때 유생이나 유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입었던 의복의 총칭이다. 유학자들이 입는 복장 역시 유복이라고 칭하였는데 대표적인 복장이 심의(深衣)이다. 따라서 유생들이 입던 치포건과 청금, 홍단령과 흑단령, 연건과 난삼을 비롯하여 유학자들이 착용하던 심의 외에 조선 후기 사대부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도포(道袍), 학창의(鶴氅衣), 야복(野服) 등도 유복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서는 조선 후기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을 저술한 명망 있는 유학자이자 서예가이다. 가학을 토대로 평생 학문을 익히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며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을 저술하고,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었다. 거문고에도 능하였으며, 경서와 제자백가도 깊이 연구하였다. 성호 이익의 형으로서 훈도하고, 그의 문인들이 ‘홍도’라는 시호를 지어 학덕을 칭송하였다.
이서 (李潊)
이서는 조선 후기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을 저술한 명망 있는 유학자이자 서예가이다. 가학을 토대로 평생 학문을 익히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며 조선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을 저술하고,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었다. 거문고에도 능하였으며, 경서와 제자백가도 깊이 연구하였다. 성호 이익의 형으로서 훈도하고, 그의 문인들이 ‘홍도’라는 시호를 지어 학덕을 칭송하였다.
송래희는 19세기 중엽 헌종과 철종 대의 유학자이며, 대사헌을 지낸 문신이다. 효종 때 산림이었던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이며, 1815년 진사 초시에 입격하였다. 1835년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된 이후, 뛰어난 학덕으로 성균관 좨주, 대사헌 등에 제수되었다. 정통 주자학적 입장을 고수하여 독서를 통해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예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고 율곡의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긍정하였다. 저서로는 『성리논변』과 『금곡선생문집』이 전한다.
송내희 (宋來熙)
송래희는 19세기 중엽 헌종과 철종 대의 유학자이며, 대사헌을 지낸 문신이다. 효종 때 산림이었던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이며, 1815년 진사 초시에 입격하였다. 1835년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된 이후, 뛰어난 학덕으로 성균관 좨주, 대사헌 등에 제수되었다. 정통 주자학적 입장을 고수하여 독서를 통해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예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고 율곡의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긍정하였다. 저서로는 『성리논변』과 『금곡선생문집』이 전한다.
최승로는 고려전기 문하시랑평장사, 문하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927년(태조 10)에 태어나 989년(성종 8)에 사망했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송도로 왔다. 유학파는 아니지만 유학에 뛰어나 문장과 학문 관련 관직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종·경종 재위기에는 큰 활약상이 보이지 않으나 성종 때 중요 관직을 맡았다. 성종이 경관 5품 이상에게 봉사를 올리게 하자 28조의 시무책을 올려 성종의 공감을 샀다.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치세 방향을 제시하여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기여한 인물이다.
최승로 (崔承老)
최승로는 고려전기 문하시랑평장사, 문하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927년(태조 10)에 태어나 989년(성종 8)에 사망했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송도로 왔다. 유학파는 아니지만 유학에 뛰어나 문장과 학문 관련 관직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종·경종 재위기에는 큰 활약상이 보이지 않으나 성종 때 중요 관직을 맡았다. 성종이 경관 5품 이상에게 봉사를 올리게 하자 28조의 시무책을 올려 성종의 공감을 샀다.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치세 방향을 제시하여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기여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에 『각암집』 등을 저술한 문인이다. 1605년 4월 12일 대구부 수성현(壽城縣) 파잠리(巴岑里) 집에서 출생하였다. 서인계 학자로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하였으며, 동문인 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하였다. 1642년 모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역병에 걸려서 이듬해 정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일찍 세상을 떠나 오언고시 5수, 오언절구 6수, 오언율시 9수, 칠언절구 23수, 칠언율시 14수가 문집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잡저에 「대학집해(大學集解)」가 있는데, 팔조목을 해설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전유경 (全有慶)
조선 후기에 『각암집』 등을 저술한 문인이다. 1605년 4월 12일 대구부 수성현(壽城縣) 파잠리(巴岑里) 집에서 출생하였다. 서인계 학자로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하였으며, 동문인 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하였다. 1642년 모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역병에 걸려서 이듬해 정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일찍 세상을 떠나 오언고시 5수, 오언절구 6수, 오언율시 9수, 칠언절구 23수, 칠언율시 14수가 문집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잡저에 「대학집해(大學集解)」가 있는데, 팔조목을 해설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광정은 조선 후기에 『소산집』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14년 안동 출생이며, 대산 이상정의 동생으로 밀암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에 종군하였다. 경학과 성리학을 연구하고 예설을 정리하여 안동 지방의 표준 예설을 세웠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후 은거하여 도를 구하는 공부에 전념했고, 정조가 몇몇 관직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학통을 계승하여 많은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1789년 향년 76세에 별세하였고, 안동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이광정 (李光靖)
이광정은 조선 후기에 『소산집』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14년 안동 출생이며, 대산 이상정의 동생으로 밀암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에 종군하였다. 경학과 성리학을 연구하고 예설을 정리하여 안동 지방의 표준 예설을 세웠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후 은거하여 도를 구하는 공부에 전념했고, 정조가 몇몇 관직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학통을 계승하여 많은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1789년 향년 76세에 별세하였고, 안동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영상은 대한제국기인 1906년 태인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가 주는 은사금을 거부하고 체포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만경강에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며, 군산형무소에 수감되어 단식 끝에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김영상 (金永相)
김영상은 대한제국기인 1906년 태인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가 주는 은사금을 거부하고 체포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만경강에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며, 군산형무소에 수감되어 단식 끝에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