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이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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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집』은 조선 후기 문신인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시문집이다. 15권 8책 구성으로 된 운각활자본(芸閣活字本)으로, 18세기 중반 이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제, 권수제, 판심제 모두 동일하게 ‘병산집’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온라인 원문 서비스도 제공된다.
병산집 (屛山集)
『병산집』은 조선 후기 문신인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시문집이다. 15권 8책 구성으로 된 운각활자본(芸閣活字本)으로, 18세기 중반 이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제, 권수제, 판심제 모두 동일하게 ‘병산집’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온라인 원문 서비스도 제공된다.
조선 후기에,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이사상 (李師尙)
조선 후기에,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대사성,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연상 (李衍祥)
조선 후기에, 대사성,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숙종 때, 노론 4대신과 함께 연잉군을 지지하다 소론 측이 일으킨 신임사화를 계기로 처형된 문신.
이천기 (李天紀)
조선 숙종 때, 노론 4대신과 함께 연잉군을 지지하다 소론 측이 일으킨 신임사화를 계기로 처형된 문신.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헌구 (李憲球)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응재집』을 저술하였으며, 경종을 시해하려했다는 목호룡의 무고로 처형된 학자.
이희지 (李喜之)
조선 후기에, 『응재집』을 저술하였으며, 경종을 시해하려했다는 목호룡의 무고로 처형된 학자.
노론 4대신은 조선 후기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 때 화를 당한 노론 계열의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명이다. 이들은 왕세제로 책봉된 영조의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소론에 의해 반역으로 몰려 유배 보내졌고,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묵호룡의 고변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영조가 즉위하며 집권한 노론들에 의해 모두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경기도 과천에 이들을 모신 사충서원이 있다. 이후 정치적 상황에 따라 포장과 환수가 반복되었다. 노론에서는 ‘사충(四忠)’으로, 소론에서는 ‘사흉(四凶)’으로 불렀다.
노론 4대신 (老論 四大臣)
노론 4대신은 조선 후기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 때 화를 당한 노론 계열의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명이다. 이들은 왕세제로 책봉된 영조의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소론에 의해 반역으로 몰려 유배 보내졌고,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묵호룡의 고변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영조가 즉위하며 집권한 노론들에 의해 모두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경기도 과천에 이들을 모신 사충서원이 있다. 이후 정치적 상황에 따라 포장과 환수가 반복되었다. 노론에서는 ‘사충(四忠)’으로, 소론에서는 ‘사흉(四凶)’으로 불렀다.
기유처분은 1729년(영조 5)에 영조가 신임옥사에 대해서 탕평파의 집권 명분 확보와 노·소론의 조합을 위해 내린 처분이다. 이 처분은 조현명, 송인명 등의 탕평세력이 당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쟁점인 신임옥사 문제의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다. 탕평파들은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요구를 역모가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노론이 요구한 4대신의 복관에서 자손이 연루되지 않은 이건명과 조태채를 신원하자고 하였다. 노·소론 모두 반대하였으나 이인좌의 난 이후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탕평파가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기유처분 (己酉處分)
기유처분은 1729년(영조 5)에 영조가 신임옥사에 대해서 탕평파의 집권 명분 확보와 노·소론의 조합을 위해 내린 처분이다. 이 처분은 조현명, 송인명 등의 탕평세력이 당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쟁점인 신임옥사 문제의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다. 탕평파들은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요구를 역모가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노론이 요구한 4대신의 복관에서 자손이 연루되지 않은 이건명과 조태채를 신원하자고 하였다. 노·소론 모두 반대하였으나 이인좌의 난 이후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탕평파가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