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김춘택(金春澤)의 사위이다.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 때 소론은 연령군(延齡君)을 지지했지만, 노론은 경종의 아우인 연잉군(延礽君, 후의 영조))을 지지하였다. 이 때 숙종은 노론의 거두인 좌상 이이명(李頤命)을 소대(召對)해 세자에게 왕위를 맡길 수 없다고 말하자 이이명이 만류해 두 왕자의 장래를 이이명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이이명은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 두 사람을 추천해 숙종의 뜻을 그들에게 전하였다. 이천기 등은 이이명의 부탁을 받고 그의 자질(子姪)인 이희지(李喜之) · 이기지(李器之)와 김창집(金昌集)의 손자 성행(省行) 등과 모의해 무사와 술객을 비밀리에 길러 비상 사태에 대비하였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1720년 8월 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李健命) · 민진원(閔鎭遠)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중심이 되고, 이천기 · 김용택 · 심상길(沈尙吉) · 서덕수(徐德修) · 정인중(鄭麟重) 등 5인과 더불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려고 강행하려다 실패해 역률(逆律)로 함께 처형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 대사성 송인명(宋寅明)이 어전에서 이천기 등은 숙종 말년부터 은으로 뇌물을 써서 내시 · 궁녀들과 결탁했으므로 처벌은 당연하다고 주청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태우고 친히 ‘대훈(大訓)’이라는 글을 지어 종묘에 고한 뒤 노론 4대신에게는 시호를 다시 주고, 이천기 등 5인에게도 벼슬을 다시 주려 하였다.
이에 박문수(朴文秀) · 이종성(李宗城) 등의 반대하자, 왕은 ‘대훈’의 글자를 수정하면서까지 모두 신원(伸寃)하게 하였다. 즉, 노론 4대신의 연차(聯箚)나 이천기 등 5인의 음모가 모두 영조를 위한 것이니 이것이 곧 나라를 위한다는 단안이었다. 식견이 높고 가벼운 의리라도 태산같이 여겼으며, 성품이 곧고 강직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