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식산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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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3월에 제정, 공포된 「농공은행조례」에 의거해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던 지방은행.
농공은행 (農工銀行)
1906년 3월에 제정, 공포된 「농공은행조례」에 의거해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던 지방은행.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나석주 (羅錫疇)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이다. 농업 경영과 이민 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7년 「동양척식주식회사법」 개정 이후 사업 범위를 만주 및 해외로 확장하였고,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개발 금융기관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군수 공업화에 편승하여 대출 업무 이외에 관계 회사 설립 및 출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주회사(持株會社)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 (東洋拓殖株式會社)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이다. 농업 경영과 이민 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7년 「동양척식주식회사법」 개정 이후 사업 범위를 만주 및 해외로 확장하였고,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개발 금융기관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군수 공업화에 편승하여 대출 업무 이외에 관계 회사 설립 및 출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주회사(持株會社)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조선은행은 1911년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중앙은행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한 금융기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은 독점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하고 국고금을 취급하는 등 중앙은행 기능을 일부 수행함과 동시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예금과 대출 업무를 취급하는 등 일반은행 업무를 겸영하면서 영리를 추구하였다. 조선은행은 일본 군부의 대륙 침략 정책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만주 및 중국에 진출하여 일제의 국책을 수행하는 동시에 자행(自行)의 영리를 추구하였다.
조선은행 (朝鮮銀行)
조선은행은 1911년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중앙은행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한 금융기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은 독점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하고 국고금을 취급하는 등 중앙은행 기능을 일부 수행함과 동시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예금과 대출 업무를 취급하는 등 일반은행 업무를 겸영하면서 영리를 추구하였다. 조선은행은 일본 군부의 대륙 침략 정책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만주 및 중국에 진출하여 일제의 국책을 수행하는 동시에 자행(自行)의 영리를 추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조의 건물로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은행건물. 근대건물.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 (韓國産業銀行 大邱支店)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조의 건물로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은행건물. 근대건물.
조병택은 한말 저포상(苧布商)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초대 한일은행장과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한 실업가이다. 한말 조진태(趙鎭泰)·백완혁(白完爀) 등과 함께 재계 세 원로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1906년 설립된 한일은행(韓一銀行) 초대 은행장이었고, 1907부터 1910년까지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했다.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중역, 한호농공은행 중역, 조선식산은행 상담역으로 활동했다.
조병택 (趙秉澤)
조병택은 한말 저포상(苧布商)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초대 한일은행장과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한 실업가이다. 한말 조진태(趙鎭泰)·백완혁(白完爀) 등과 함께 재계 세 원로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1906년 설립된 한일은행(韓一銀行) 초대 은행장이었고, 1907부터 1910년까지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했다.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중역, 한호농공은행 중역, 조선식산은행 상담역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