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조병택은 한말 저포상(苧布商)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초대 한일은행장과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한 실업가이다. 한말 조진태(趙鎭泰)·백완혁(白完爀) 등과 함께 재계 세 원로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1906년 설립된 한일은행(韓一銀行) 초대 은행장이었고, 1907부터 1910년까지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했다.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중역, 한호농공은행 중역, 조선식산은행 상담역으로 활동했다.
정의
한말, 저포상(苧布商)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초대 한일은행장과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한 실업가.
인적사항
주요 활동
화폐정리사업으로 발생한 전황으로 인해 파산 상태에 빠진 상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1905년 설립한 한성공동창고(주) 중역, 한성어음조합(漢城手形組合) 조합원이었다. 1905년 7월 경성의 대표적 상인 30여 명이 설립한 경성상업회의소(京城商業會議所)의 조사감독, 의원, 회두(會頭)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활동했다.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권고로 화폐정리사업으로 인해 전황을 겪은 한성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906년 한일은행(韓一銀行)을 설립할 때 은행 건축비와 설비 비용을 자신이 충당하고, 초대 은행장으로 활동했다. 은행 영업 자금을 조달받고 전무로 영입한 백인기와 수년간에 걸친 주식 분배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1912년 사임했다.
1908년 한성재목시탄(漢城材木柴炭)주식회사 찬성원, 경성융흥주식회사 대주주, 1909년 용달 회사(用達會社)인 공수(供需)주식회사 중역이었다. 1914년 2월 설립한 조선무역주식회사의 사장으로 활동했다.
조병택은 1918년 이후 조선 식산 은행(朝鮮殖産銀行)의 상담역(相談役)으로 활동했다. 조선 식산 은행의 창립이 농공은행의 합병에 의해 출발했기 때문에 옛 농공은행 중역을 상담역(相談役)으로 촉탁(囑託)했는데, 조병택은 한호농공은행의 취체역(取締役)이었기 때문에 임명되었다. 상담역은 은행 영업에 대해 연 2회 자문하는 역할이었다. 1919년 2월 설립된 조선인삼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활동했다.
관직은 대개 허직(虛職)으로 훈련주부, 훈련판관, 관리서(管理署) 부관리(副管理)를 지냈고 품계는 1903년(광무 7년) 종2품에 이르렀다. 1905년(광무 9년) 2월 중추원 의관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 8월 16일 ‘한일은행장 조병택’은 훈5등에 특별히 서훈(敍勳)되고, 태극장을 하사받았다.
1921년에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發起人)으로 활동했다.
사회적 활동으로는 한말(韓末)에 사립 공성학교(共成學校) 설립을 주도했으며, 1913년경에는 재정이 곤란한 중앙학교 유지비를 매년 지원했다. 1922년 1월 자신이 거주하는 동대문 밖 숭인동 부근 빈민들에게 쌀과 돈을 분급하는 선심을 베풀었다.
말년에 엄비(嚴妃) 유산 문제로 엄주승(嚴柱承)과 수년간 벌인 25만 원의 토지 소송, 아들 조영희의 약속(約束) 어음 사기, 회사 투자 실패 등으로 인해 부채 독촉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1924년 9월 자살했다. 수의도 외상으로 구매하고 장례 비용도 식산 은행(殖産銀行)에서 보낸 오백 원으로 간신히 치뤘다는 매일신보 기사로 보아 완전히 파산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 조영희 편, 『수당하술(隨堂賀述)』(의성루, 1919)
단행본
- 『대한제국관보』 제 3059호(1905년 2월 10일)
- 『조선은행회사요록(朝鮮銀行會社要錄)』(1921)
- 『조선은행회사요록(朝鮮銀行會社要錄)』(1923)
- 田中正剛 편,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조선문우회(朝鮮文友會), 1913)
- 守屋德夫, 『조선식산은행십년지(朝鮮殖産銀行十年志)』(조선식산은행, 1930)
- 田中市之助 편, 『전선상공회의소발달사(全鮮商工會議所發達史)』(부산일보사, 1936)
기타 자료
- '생활난에 자살?', 『시대일보』 (1924. 9. 11)
- '조병택씨 시혜', 『매일신보』 (1922. 1. 30)
- '조선인물관: 實業界 三元老 중의 一人 趙秉澤氏', 『매일신보』 (1912. 12. 10)
- '한성의 사교계', 『매일신보』 (1914. 1. 1)
- '畿湖 唯一의 篤志', 『매일신보』 (1913. 12. 19)
- '趙秉澤氏 呈訴', 『매일신보』 (1922. 12. 9)
- '財産家의 嗣子 사기를 하엿다', 『동아일보』 (1923. 5. 2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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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무릎의 아래라는 뜻으로, 어버이나 조부모의 보살핌 아래. 주로 부모의 보호를 받는 테두리 안을 이른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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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태어난 지 60돌이 되는 해. 또는 그 나이.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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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의 총독에 버금갔던 관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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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수립된 공화국.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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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영사의 다음 위치에 있는 외교관. 총영사관이나 영사관에서 영사를 보좌하는 외무 공무원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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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중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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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축하의 뜻을 나타내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함. 또는 그 글이나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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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1910년 8월에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창간한 일간 신문. 국권 강탈 후 ≪대한매일신보≫를 강제 매수 하여 발행한 것으로, 국한문판과 한글판으로 간행하였으며 1945년에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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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모임을 대표하고 모임의 일을 총괄하는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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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불입자본금 10만 원, 가옥임대, 대금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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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상품이나 물건 따위를 전문적으로 배달하는 일을 하는 기업체.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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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2
: 공칭자본금 10만 원, 내외 물산 무역업, 부동산 매매 및 금전대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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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3
: 1918년에 산업 기관에 자금을 대출할 목적으로 설립한 특수 은행.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일제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광복 이후 한국 식산 은행으로 되었다가 1952년에 한국 산업 은행에 흡수되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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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
: 일을 부탁하여 맡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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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5
: 예전에, 주식회사의 이사(理事)를 이르던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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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6
: 상담의 상대가 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에 대하여 조언하는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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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7
: 자본금 5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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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8
: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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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9
: 대한 제국 때에 둔 군기시의 한 벼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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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0
: 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이나 포장을 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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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1
: 앞장서서 어떤 일을 할 것을 주장하고 그 방안을 마련하는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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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2
: 대한 제국의 마지막 시기.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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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3
: 발행한 사람이 그 어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여 발행하는 어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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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4
: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에서 신용 기구를 통한 착취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은행. 보통 은행의 업무를 겸하면서 농촌 수탈에 자금을 대 주고 식민지 산업을 지원하며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약탈을 감행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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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5
: 구한말에, 농업ㆍ상업ㆍ공업 및 우체, 전신, 광산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고종 32년(1895)에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합쳐 만들었고, 융희 4년(1910)까지 있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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