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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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조선전기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01년(연산군 7)에 태어나 1570년(선조 3)에 사망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나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이후 고향 퇴계에 은거하여 학자의 삶을 살았다. 명유들과 토론하고 『주자대전』 등 주자학 관련서적을 주해·편찬하고 후진들을 양성하여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거대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했다. 68세에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사후 그를 기리는 서원을 지어 도산서원 사액을 받고 위패를 모셨다.
이황 (李滉)
이황은 조선전기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01년(연산군 7)에 태어나 1570년(선조 3)에 사망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나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이후 고향 퇴계에 은거하여 학자의 삶을 살았다. 명유들과 토론하고 『주자대전』 등 주자학 관련서적을 주해·편찬하고 후진들을 양성하여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거대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했다. 68세에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사후 그를 기리는 서원을 지어 도산서원 사액을 받고 위패를 모셨다.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조소앙 (趙素昻)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安在鴻)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한글학회는 1908년 우리 말글의 연구와 통일 및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된 학술단체이다. 주시경과 김정진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세운 민족학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단체이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한글날의 시초인 ‘가갸날’로 정하였다. 1928년에 착수한 『큰사전』 편찬 작업을 28년 만인 1957년 마무리 하였다.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1941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간행하였다. 광복을 맞은 후에는 교과서를 편찬·보급하였으며, 국어 교사를 양성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글문화를 보급하고, 우리 말글의 선양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한글학회 (한글學會)
한글학회는 1908년 우리 말글의 연구와 통일 및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된 학술단체이다. 주시경과 김정진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세운 민족학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단체이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한글날의 시초인 ‘가갸날’로 정하였다. 1928년에 착수한 『큰사전』 편찬 작업을 28년 만인 1957년 마무리 하였다.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1941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간행하였다. 광복을 맞은 후에는 교과서를 편찬·보급하였으며, 국어 교사를 양성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글문화를 보급하고, 우리 말글의 선양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일제강점기 요업기술자, 과학기술 진흥 및 대중화에 힘쓴 사회운동가.
김용관 (金容瓘)
일제강점기 요업기술자, 과학기술 진흥 및 대중화에 힘쓴 사회운동가.
해방 이후 『국사요론』, 『한국만주관계사의 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서지학자.
이인영 (李仁榮)
해방 이후 『국사요론』, 『한국만주관계사의 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서지학자.
문일평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문일평 (文一平)
문일평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국가 학술 및 과학기술진흥과 연구역량 제고를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
한국학술진흥재단 (韓國學術振興財團)
국가 학술 및 과학기술진흥과 연구역량 제고를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
손진태(孫晋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학자이다. 1920, 1930년대에는 주로 현지 조사에 기초한 왕성한 민속 자료 수집과 동서양의 방대한 문헌 섭렵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 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광복 후에는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민족사 연구의 성과들을 집성하고 교육 관료로서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손진태 (孫晋泰)
손진태(孫晋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학자이다. 1920, 1930년대에는 주로 현지 조사에 기초한 왕성한 민속 자료 수집과 동서양의 방대한 문헌 섭렵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 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광복 후에는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민족사 연구의 성과들을 집성하고 교육 관료로서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김도연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4년 경기도 양천군 출생으로 1919년 게이오 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유학 시절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 9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미국 유학 후 1931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6년 이후 다수의 의원직을 역임하였으며, 1967년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1991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김도연 (金度演)
김도연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4년 경기도 양천군 출생으로 1919년 게이오 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유학 시절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 9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미국 유학 후 1931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6년 이후 다수의 의원직을 역임하였으며, 1967년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1991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서북학회는 1908년 서북·관서·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이다. 일본의 탄압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어렵게 되자,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조직되었다.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고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 69개 지역에 지교를 두었다. 『서북학회월보』를 발간하여 사회진화론과 민권론을 기반으로 민중의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애국계몽운동을 확산하였다. 1909년 만주 등지에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국외독립군운동으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서북학회 (西北學會)
서북학회는 1908년 서북·관서·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이다. 일본의 탄압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어렵게 되자,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조직되었다.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고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 69개 지역에 지교를 두었다. 『서북학회월보』를 발간하여 사회진화론과 민권론을 기반으로 민중의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애국계몽운동을 확산하였다. 1909년 만주 등지에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국외독립군운동으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미술사학은 조형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그 양식의 변천, 발달 과정을 연구하고 문화사적·역사적 의의를 분석, 해석하는 학문이다. ‘미술사’라는 말은 독일에서 사용한 ‘미술의 역사(kunstgeschichte)’ 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근역서화징』(1928)을 편찬한 오세창이 미술사 연구의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 고유섭은 현대적 의미의 한국미술사 연구에 공헌했다. 1960년 김원룡, 전형필, 진홍섭, 최순우, 황수영 등에 의하여 발족된 고고미술동인회는 광복 후 미술사학 연구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이 단체는 현재 한국미술사학회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미술사학 (美術史學)
미술사학은 조형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그 양식의 변천, 발달 과정을 연구하고 문화사적·역사적 의의를 분석, 해석하는 학문이다. ‘미술사’라는 말은 독일에서 사용한 ‘미술의 역사(kunstgeschichte)’ 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근역서화징』(1928)을 편찬한 오세창이 미술사 연구의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 고유섭은 현대적 의미의 한국미술사 연구에 공헌했다. 1960년 김원룡, 전형필, 진홍섭, 최순우, 황수영 등에 의하여 발족된 고고미술동인회는 광복 후 미술사학 연구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이 단체는 현재 한국미술사학회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는 1908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자기(磁器) 회사이다. 1908년 50원의 주식 200주를 자산으로 평양 마산동에 설립되었다. 대한제국기(1908~1910)에는 평양의 유지 자본가들을 최고경영진으로 두면서 사무직원과 기술인력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여 선발하고, 사무직은 조선인만을 고용하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일제식민지 시기(1910~1919)에 들어서면서 임원이 모두 교체되는 등의 위기를 겪지만, 이후 다양한 건의와 요구가 반영되어 1913년부터 연간 1,200원가량의 정부 지원금이 보조되었다.
평양 자기 제조 주식회사 (平壤 磁器 製造 株式會社)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는 1908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자기(磁器) 회사이다. 1908년 50원의 주식 200주를 자산으로 평양 마산동에 설립되었다. 대한제국기(1908~1910)에는 평양의 유지 자본가들을 최고경영진으로 두면서 사무직원과 기술인력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여 선발하고, 사무직은 조선인만을 고용하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일제식민지 시기(1910~1919)에 들어서면서 임원이 모두 교체되는 등의 위기를 겪지만, 이후 다양한 건의와 요구가 반영되어 1913년부터 연간 1,200원가량의 정부 지원금이 보조되었다.
이병도는 해방 이후 『국사대관』·『한국고대사연구』·『두계잡필』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896년(고종 33)에 태어나 1989년 사망했다. 보성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였다. 『폐허』의 창간에 동참하였고,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와 촉탁 등을 역임했다. 1934년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진단학보』를 간행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민족문화추진회의 발족에 참여하여 고전의 국역과 편찬사업을 활발히 진행했다.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을 뿌리내리게 한 역사학자로 한국근대사학의 성립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병도 (李丙燾)
이병도는 해방 이후 『국사대관』·『한국고대사연구』·『두계잡필』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896년(고종 33)에 태어나 1989년 사망했다. 보성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였다. 『폐허』의 창간에 동참하였고,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와 촉탁 등을 역임했다. 1934년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진단학보』를 간행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민족문화추진회의 발족에 참여하여 고전의 국역과 편찬사업을 활발히 진행했다.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을 뿌리내리게 한 역사학자로 한국근대사학의 성립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김철준은 해방 이후 「한국고대사회 연구」, 「한국문화사론」, 「한국문화전통론」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23년에 태어나 1989년에 사망했다. 1948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역사학회 창립에 동참하였다. 일본이 주장한 식민사학의 잔재를 청산하고, 문헌 고증학의 방법론적 한계를 극복해 자주적이고 과학적인 새로운 학풍을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학 발전과 문화재(현, 국가유산) 보호에도 노력을 기울여 한국사연구회와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와 논문을 엮어서 『일계전집(一溪全集)』(4책)으로 간행하였다.
김철준 (金哲埈)
김철준은 해방 이후 「한국고대사회 연구」, 「한국문화사론」, 「한국문화전통론」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23년에 태어나 1989년에 사망했다. 1948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역사학회 창립에 동참하였다. 일본이 주장한 식민사학의 잔재를 청산하고, 문헌 고증학의 방법론적 한계를 극복해 자주적이고 과학적인 새로운 학풍을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학 발전과 문화재(현, 국가유산) 보호에도 노력을 기울여 한국사연구회와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와 논문을 엮어서 『일계전집(一溪全集)』(4책)으로 간행하였다.
노백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무관으로서 서북학회, 대한흥학회,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 후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노백린 (盧伯麟)
노백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무관으로서 서북학회, 대한흥학회,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 후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허웅은 해방 이후 『국어음운론』, 『우리 옛말본』,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918년에 태어나 2004년에 사망하였으며 호는 눈뫼이다.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을 읽고 국어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해방 후에 부산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국어음운론』(1958)에서 국어의 음운론을 공시적·통시적 기술을 시도하였다. 『우리 옛말본』(1975)에서 15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공시적으로 기술하였다.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에서 우리말 연구의 정통성을 이었다.
허웅 (許雄)
허웅은 해방 이후 『국어음운론』, 『우리 옛말본』,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918년에 태어나 2004년에 사망하였으며 호는 눈뫼이다.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을 읽고 국어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해방 후에 부산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국어음운론』(1958)에서 국어의 음운론을 공시적·통시적 기술을 시도하였다. 『우리 옛말본』(1975)에서 15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공시적으로 기술하였다.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에서 우리말 연구의 정통성을 이었다.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김석형 (金錫亨)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장, 경주분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연재고고논집』, 『백제의 전설』, 『백제문화와 부여』 등을 저술한 미술사학자.
홍사준 (洪思俊)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장, 경주분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연재고고논집』, 『백제의 전설』, 『백제문화와 부여』 등을 저술한 미술사학자.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
보인고등학교 (輔仁高等學校)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