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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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19대(재위: 391년~413년) 왕. 광개토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91년~412년이다. 즉위 초부터 적극적으로 백제를 공략하여 한강 너머까지 진격했다. 백제가 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고지와 배후 신라를 치자 병력을 보내 왜구를 궤멸시켰다.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로 하여금 복속의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했다. 후연이 공격하자 반격하여 요동성 일대를 장악했고, 거란·식신·숙신을 정벌하는 등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했으며, 내정 정비에도 노력했다.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했다.재위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다.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왕 (廣開土王)
고구려의 제19대(재위: 391년~413년) 왕. 광개토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91년~412년이다. 즉위 초부터 적극적으로 백제를 공략하여 한강 너머까지 진격했다. 백제가 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고지와 배후 신라를 치자 병력을 보내 왜구를 궤멸시켰다.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로 하여금 복속의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했다. 후연이 공격하자 반격하여 요동성 일대를 장악했고, 거란·식신·숙신을 정벌하는 등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했으며, 내정 정비에도 노력했다.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했다.재위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다.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석.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석이다. 삼국시대인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19세기 말에 재발견된 광개토왕릉비문은 사료가 부족한 4~5세기 고구려의 정치 · 사회사와 더불어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일대 여러 세력들의 정세도 함께 살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능비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인데, 광개토왕의 사후에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다는 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무덤 인근에 세웠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광개토(대)왕릉비’, 혹은 ‘광개토왕비’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광개토왕’이라는 왕호 대신, 능비문에 보이는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왕릉비 (廣開土王陵碑)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석.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석이다. 삼국시대인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19세기 말에 재발견된 광개토왕릉비문은 사료가 부족한 4~5세기 고구려의 정치 · 사회사와 더불어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일대 여러 세력들의 정세도 함께 살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능비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인데, 광개토왕의 사후에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다는 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무덤 인근에 세웠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광개토(대)왕릉비’, 혹은 ‘광개토왕비’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광개토왕’이라는 왕호 대신, 능비문에 보이는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1972년 이진희가 광개토왕릉비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는 1972년 이진희가 광개토왕릉비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이다. 일본 동경의 요시카와고분관에서 간행되었다. 본문·자료편·별책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료편에는 15종의 연구문헌과 각종의 능비 사진 및 미즈타니탁본을 영인·수록하였다. 이진희는 이 책을 통해 능비에 대한 초기 연구를 일본 관학이 주도하면서 고대 일본의 한반도 경영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 변조되었으므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 변조 사실을 처음으로 밝힘으로써 한일 학계의 최대 쟁점이 능비 연구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그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토대로 이러한 비문변조설을 보다 체계화한 것이다. # 내용 본문은 제1장 광개토...
광개토왕릉비의 연구 (廣開土王陵碑의 硏究)
1972년 이진희가 광개토왕릉비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는 1972년 이진희가 광개토왕릉비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이다. 일본 동경의 요시카와고분관에서 간행되었다. 본문·자료편·별책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료편에는 15종의 연구문헌과 각종의 능비 사진 및 미즈타니탁본을 영인·수록하였다. 이진희는 이 책을 통해 능비에 대한 초기 연구를 일본 관학이 주도하면서 고대 일본의 한반도 경영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 변조되었으므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 변조 사실을 처음으로 밝힘으로써 한일 학계의 최대 쟁점이 능비 연구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그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토대로 이러한 비문변조설을 보다 체계화한 것이다. # 내용 본문은 제1장 광개토...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 관련 청동제 그릇에 새겨진 명문. 호우 명문^1]은 그릇의 밑면에 4행 4자씩 총 16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고 새겨져 있다. 글씨는 주조 당시부터 외형틀에 음각으로 새겨 넣음으로써 두터운 양각명으로 돌출된 것이다. 호우는 [고구려 장수왕 3년 을묘년인 415년에 만든 것으로 광개토왕비의 서체와 유사하다. ‘十’의 의미는 열 개를 주조하였음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불교사상에 의한 원만, 무진함을 나타낸다고 보는 설, 什器의 什의 약체로 보는 설, 일종의 종지부(終止符) 혹은 길상(吉相)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명문 상단에 보이는 ‘#’의 표시는 어떤...
광개토왕호 우명문 (廣開土王壺 杅銘文)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 관련 청동제 그릇에 새겨진 명문. 호우 명문^1]은 그릇의 밑면에 4행 4자씩 총 16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고 새겨져 있다. 글씨는 주조 당시부터 외형틀에 음각으로 새겨 넣음으로써 두터운 양각명으로 돌출된 것이다. 호우는 [고구려 장수왕 3년 을묘년인 415년에 만든 것으로 광개토왕비의 서체와 유사하다. ‘十’의 의미는 열 개를 주조하였음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불교사상에 의한 원만, 무진함을 나타낸다고 보는 설, 什器의 什의 약체로 보는 설, 일종의 종지부(終止符) 혹은 길상(吉相)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명문 상단에 보이는 ‘#’의 표시는 어떤...
한자를 이용한 우리나라의 관직명·인명·지명 등에 대한 표기법. 고유명사표기는 한자를 이용한 우리나라의 관직명·인명·지명 등에 대한 표기법이다. 한자의 전래 이후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기록으로 남고고자 시도한 것이다. 우리의 고유명사 표기는 음차 방식에서 시작되었으며 석독 표기가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의 고유명사 표기는 금석문 외에 목간 자료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이 표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삼국사기』의 어휘에는 고지명과 왕명, 인명 등에 대한 고유명사 표기도 있다. 고유명사표기는 차자 표기의 원리를 발달시켰으며 차자 표기법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대개토(大開土)’에 대응된다고 하였다. 즉 이러한 대응을 통해 ‘광(廣)’과 ‘대(大)’가 같은...
고유명사표기 (固有名詞表記)
한자를 이용한 우리나라의 관직명·인명·지명 등에 대한 표기법. 고유명사표기는 한자를 이용한 우리나라의 관직명·인명·지명 등에 대한 표기법이다. 한자의 전래 이후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기록으로 남고고자 시도한 것이다. 우리의 고유명사 표기는 음차 방식에서 시작되었으며 석독 표기가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의 고유명사 표기는 금석문 외에 목간 자료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이 표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삼국사기』의 어휘에는 고지명과 왕명, 인명 등에 대한 고유명사 표기도 있다. 고유명사표기는 차자 표기의 원리를 발달시켰으며 차자 표기법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대개토(大開土)’에 대응된다고 하였다. 즉 이러한 대응을 통해 ‘광(廣)’과 ‘대(大)’가 같은...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에 있는 사립종합대학교. 영남대학교는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1967년에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병하여 설립되었다.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를 설립자로 하여 발족하였고 초대 총장으로 신기석이 취임하였다. 현재 18개 단과대학, 68개 학부(과), 12개 대학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9년 교육개혁 추진 우수대학, 2010년에 교육역량강화사업, 2013년에 국제협력선도대학으로 선정되었다. 교훈은 ‘슬기·힘·정성'이며 '미래를 만드는 대학'이 비전이다. 고급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인재 육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로비에는 높이 6m의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의 탁본이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으며, 1층은 상설전시실로 고고, 조각 · 공예, 서화, 민속, 기증실로 구성되어 있고...
영남대학교 (嶺南大學校)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에 있는 사립종합대학교. 영남대학교는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1967년에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병하여 설립되었다.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를 설립자로 하여 발족하였고 초대 총장으로 신기석이 취임하였다. 현재 18개 단과대학, 68개 학부(과), 12개 대학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9년 교육개혁 추진 우수대학, 2010년에 교육역량강화사업, 2013년에 국제협력선도대학으로 선정되었다. 교훈은 ‘슬기·힘·정성'이며 '미래를 만드는 대학'이 비전이다. 고급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인재 육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로비에는 높이 6m의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의 탁본이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으며, 1층은 상설전시실로 고고, 조각 · 공예, 서화, 민속, 기증실로 구성되어 있고...
고구려 중기,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요서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거쳐갔던 지명. 부산(富山)은 고구려 중기에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요서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거쳐갔던 지명이다. 관련 내용은 중국측 사서와 「광개토왕릉비」에 등장한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고구려군이 공손도를 도와서 ‘부산의 적'을 공격하여 깨뜨렸다는 기사가 있으며,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서요하의 패려라는 부족을 공격하면서 부산을 지났다는 기사가 있다. 위치는 랴오닝성 개원시 혹은 창도현 방면으로 볼 수 있다.14, 고구려발해학회, 2002) - 노태돈, 「광개토왕릉비」(『역주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서영수,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중)」(『역사학보』 119, 역사학회, 1988)
부산 (富山)
고구려 중기,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요서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거쳐갔던 지명. 부산(富山)은 고구려 중기에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요서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거쳐갔던 지명이다. 관련 내용은 중국측 사서와 「광개토왕릉비」에 등장한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고구려군이 공손도를 도와서 ‘부산의 적'을 공격하여 깨뜨렸다는 기사가 있으며,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서요하의 패려라는 부족을 공격하면서 부산을 지났다는 기사가 있다. 위치는 랴오닝성 개원시 혹은 창도현 방면으로 볼 수 있다.14, 고구려발해학회, 2002) - 노태돈, 「광개토왕릉비」(『역주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서영수,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중)」(『역사학보』 119, 역사학회, 1988)
고구려 중기, 흥안령(興安嶺)산맥 남쪽에 있는 지명. 부산(負山)은 고구려 중기, 흥안령(興安嶺)산맥 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광개토왕릉비」에 등장하는데, 395년 당시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이 패려라는 세력을 치기 위하여 지나갔던 곳이다. 요령성 개원시 혹은 창도현 방면으로 비정되는 부산(富山)에서 서요하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 산지(山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략 흥안령(興安嶺)산맥 남쪽 끝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된다.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2013) - 이재성, 「4~5세기 고구려와 거란」(『고구려발해연구』 14, 고구려발해학회, 2002) - 노태돈, 「광개토왕릉비」(『역주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서영수,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중)」(『역사학보』 119, 역사학회, 1988)
부산 (負山)
고구려 중기, 흥안령(興安嶺)산맥 남쪽에 있는 지명. 부산(負山)은 고구려 중기, 흥안령(興安嶺)산맥 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광개토왕릉비」에 등장하는데, 395년 당시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이 패려라는 세력을 치기 위하여 지나갔던 곳이다. 요령성 개원시 혹은 창도현 방면으로 비정되는 부산(富山)에서 서요하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 산지(山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략 흥안령(興安嶺)산맥 남쪽 끝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된다.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2013) - 이재성, 「4~5세기 고구려와 거란」(『고구려발해연구』 14, 고구려발해학회, 2002) - 노태돈, 「광개토왕릉비」(『역주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서영수,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중)」(『역사학보』 119, 역사학회, 1988)
삼국시대 고구려의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역사용어. 노객은 고구려 왕이 백제나 신라 왕을 칭하거나 고구려 신하가 왕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다. 「광개토왕비문」, 「모두루묘지」, 「충주고구려비」에 나온다. 광개토왕비문과 충주고구려비에 나온 노객은 백제 왕과 신라 왕을 뜻한다. 모두루묘지에 나온 노객은 고구려의 관료인 모두루가 왕에 대해 자신을 낮춰 표현한 것이다. 노객은 본래 속민이나 노예를 뜻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신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고구려가 주변국에 비해 우월하다는 의식 곧, 고구려적 천하관에 따라 사용된 것이다.# 개설 노객(奴客)은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충주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나오는 용어이다. 본래는 사속민(私屬民)이나 노예를...
노객 (奴客)
삼국시대 고구려의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역사용어. 노객은 고구려 왕이 백제나 신라 왕을 칭하거나 고구려 신하가 왕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다. 「광개토왕비문」, 「모두루묘지」, 「충주고구려비」에 나온다. 광개토왕비문과 충주고구려비에 나온 노객은 백제 왕과 신라 왕을 뜻한다. 모두루묘지에 나온 노객은 고구려의 관료인 모두루가 왕에 대해 자신을 낮춰 표현한 것이다. 노객은 본래 속민이나 노예를 뜻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신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고구려가 주변국에 비해 우월하다는 의식 곧, 고구려적 천하관에 따라 사용된 것이다.# 개설 노객(奴客)은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충주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나오는 용어이다. 본래는 사속민(私屬民)이나 노예를...
고구려 중기, 요동 방면에 있던 지명. 북풍(北豊)은 고구려 중기, 요동 방면에 있던 지명이다.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395년(광개토왕 5)에 광개토왕이 요서 지역에 있던 패려를 공략하고 돌아오는 길에 북풍을 지나며 영토를 시찰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438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망명한 북연의 왕 풍홍을 평고가에 두었다가 나중에 북풍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북풍의 위치는 크게 요령성 개주시에서 멀지 않은 요동반도 남서부의 해안가 일대로 보는 의견, 그보다 동쪽의 내륙 지역인 요령성 수암현이나 본계시 일대로 보는 의견 등이 있다.이와 관련하여 「광개토왕릉비」의 영락 5년(395)조에는 광개토왕이 요서 지역에 있던 거란족의 일파인 패려(稗麗)를 공략하고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襄平道)...
북풍 (北豊)
고구려 중기, 요동 방면에 있던 지명. 북풍(北豊)은 고구려 중기, 요동 방면에 있던 지명이다.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395년(광개토왕 5)에 광개토왕이 요서 지역에 있던 패려를 공략하고 돌아오는 길에 북풍을 지나며 영토를 시찰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438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망명한 북연의 왕 풍홍을 평고가에 두었다가 나중에 북풍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북풍의 위치는 크게 요령성 개주시에서 멀지 않은 요동반도 남서부의 해안가 일대로 보는 의견, 그보다 동쪽의 내륙 지역인 요령성 수암현이나 본계시 일대로 보는 의견 등이 있다.이와 관련하여 「광개토왕릉비」의 영락 5년(395)조에는 광개토왕이 요서 지역에 있던 거란족의 일파인 패려(稗麗)를 공략하고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襄平道)...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왕이나 귀족의 능묘를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동원되었던 연호(烟戶). 수묘인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왕이나 귀족의 능묘를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동원되었던 연호(烟戶)이다. 수묘호(守墓戶)이나 수릉인(守陵人)이라고도 한다. 죽은 뒤에도 죽기 전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 믿는 계세사상(繼世思想)과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을 돌보아 준다는 조상숭배사상의 영향으로 왕이나 귀족들은 무덤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수묘인 연호(烟戶)의 편성과 수묘제(守墓制)의 정비 등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신라와 백제에서도 수묘인 제도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또한,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 戶)의 편성과 수묘제(守墓制)의 정비...
수묘인 (守墓人)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왕이나 귀족의 능묘를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동원되었던 연호(烟戶). 수묘인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왕이나 귀족의 능묘를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동원되었던 연호(烟戶)이다. 수묘호(守墓戶)이나 수릉인(守陵人)이라고도 한다. 죽은 뒤에도 죽기 전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 믿는 계세사상(繼世思想)과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을 돌보아 준다는 조상숭배사상의 영향으로 왕이나 귀족들은 무덤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수묘인 연호(烟戶)의 편성과 수묘제(守墓制)의 정비 등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신라와 백제에서도 수묘인 제도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또한,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 戶)의 편성과 수묘제(守墓制)의 정비...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하양어두(下羊魚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수사(守事) 모두루 관련 묘지석. 묘지(墓誌). 모두루 묘지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하양어두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관리 모두루의 묘지이다. 이 묘에서 주목할 것은 전실 벽에서 발견된 묘지명이다. 묘지명은 현재 250여 자만 판독가능하다. 내용은 모두루의 조상의 이야기와 그의 생애에 대한 것으로 모두루의 조상은 북부여 출신이고 활동 시기는 광개토왕 때임을 알 수 있다. 특징적인 점은 광개토왕릉비의 내용과 표현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묘지명을 통해 4∼5세기 고구려 왕권의 실상과 고구려의 지방 지배 방식, 당시의 씨족 계승 의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묘지명에 의하면 모두루는 광개토왕 시대에 조상의 공에 인연하여 왕의 은혜를 받아...
모두루 묘지 (牟頭婁 墓誌)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하양어두(下羊魚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수사(守事) 모두루 관련 묘지석. 묘지(墓誌). 모두루 묘지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하양어두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관리 모두루의 묘지이다. 이 묘에서 주목할 것은 전실 벽에서 발견된 묘지명이다. 묘지명은 현재 250여 자만 판독가능하다. 내용은 모두루의 조상의 이야기와 그의 생애에 대한 것으로 모두루의 조상은 북부여 출신이고 활동 시기는 광개토왕 때임을 알 수 있다. 특징적인 점은 광개토왕릉비의 내용과 표현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묘지명을 통해 4∼5세기 고구려 왕권의 실상과 고구려의 지방 지배 방식, 당시의 씨족 계승 의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묘지명에 의하면 모두루는 광개토왕 시대에 조상의 공에 인연하여 왕의 은혜를 받아...
관미령에서 벌어진 백제와 말갈 · 고구려와의 전투. 관미령전투(關彌嶺戰鬪)는 관미령에서 벌어진 백제와 말갈 · 고구려와의 전투이다.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 오두산성, 예성강 중류 남안, 강화 교동도의 화개산성, 강화 하음산성, 황해도 개풍군 백마산 부근으로 보는 설 등이 있으나, 이 중 오두산성으로 보는 설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미령과 관미성은 고구려의 남하로이자 백제 북방의 요충지였고,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광개토왕 즉위 해(391)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여 일만에 함락시켰다고 한다.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가 1년이 다른 것은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1]에 의한 차이로,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관미성의 위치는 전투...
관미령전투 (關彌嶺戰鬪)
관미령에서 벌어진 백제와 말갈 · 고구려와의 전투. 관미령전투(關彌嶺戰鬪)는 관미령에서 벌어진 백제와 말갈 · 고구려와의 전투이다.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 오두산성, 예성강 중류 남안, 강화 교동도의 화개산성, 강화 하음산성, 황해도 개풍군 백마산 부근으로 보는 설 등이 있으나, 이 중 오두산성으로 보는 설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미령과 관미성은 고구려의 남하로이자 백제 북방의 요충지였고,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광개토왕 즉위 해(391)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여 일만에 함락시켰다고 한다.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가 1년이 다른 것은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1]에 의한 차이로,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관미성의 위치는 전투...
고구려의 제20대(재위: 413년~490년) 왕. 장수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13~490년이며 광개토왕의 장자이다.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다각적인 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서방의 안정을 기했다. 이를 토대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했고 427년에는 평양성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후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했다. 신라와는 평화관계를 유지하다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자 실직주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시기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왕으로 98세에 서거했다.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 생애 및 활동사항 재위 기간 동안...
장수왕 (長壽王)
고구려의 제20대(재위: 413년~490년) 왕. 장수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13~490년이며 광개토왕의 장자이다.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다각적인 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서방의 안정을 기했다. 이를 토대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했고 427년에는 평양성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후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했다. 신라와는 평화관계를 유지하다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자 실직주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시기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왕으로 98세에 서거했다.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 생애 및 활동사항 재위 기간 동안...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태왕향 하해방촌(太王鄕 下解放村)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 봉토식석실분. 모두루총은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향 하해방촌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이다. 돌방봉토무덤으로 외형은 절두방추형이고, 내부 구조는 두방무덤으로서 앞방에 옆방이나 감실은 없다. 무덤 안에 묵서된 800여 자의 묘지와 기타 관련 자료를 분석하여 무덤의 주인은 광개토대왕의 신하인 모두루로 확인되었다. 묘지에는 모두루가의 흥성 과정과 고구려인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비롯하여 고구려 관등명, 성민·곡민과 같은 지방제도 관련 내용 등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또한 부여를 둘러싼 선비 모용부와에 대한 내용을 통해 4∼5세기 대외 관계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이다.아니라 광개토왕...
모두루총 (牟頭婁塚)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태왕향 하해방촌(太王鄕 下解放村)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 봉토식석실분. 모두루총은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향 하해방촌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이다. 돌방봉토무덤으로 외형은 절두방추형이고, 내부 구조는 두방무덤으로서 앞방에 옆방이나 감실은 없다. 무덤 안에 묵서된 800여 자의 묘지와 기타 관련 자료를 분석하여 무덤의 주인은 광개토대왕의 신하인 모두루로 확인되었다. 묘지에는 모두루가의 흥성 과정과 고구려인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비롯하여 고구려 관등명, 성민·곡민과 같은 지방제도 관련 내용 등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또한 부여를 둘러싼 선비 모용부와에 대한 내용을 통해 4∼5세기 대외 관계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이다.아니라 광개토왕...
삼국시대, 평양시 금수산(錦繡山)에 있었던 고구려 동명성왕의 유지로 광개토왕 때 창건한 사찰. 영명사(永明寺)는 평양시 금수산(錦繡山)에 있는 고구려의 제1대 동명성왕의 유지로 광개토왕 때 창건한 사찰이라는 전승이 있다.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절이 있어 고려시대 왕들이 행차하여 풍경을 즐겼던 곳 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때는 31본산 중 하나였으나 한국전쟁 때 사찰이 소실되었다.이 절이 창건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구려 광개토왕 때 지어진 것으로 기록된 9개의 절 중 하나라는 전승이 있다. 동명성왕의 구제궁(九梯宮) 유지에 392년(광개토왕 2)에 절을 창건하고 아도 화상(阿道和尙)[^1]을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 변천 고려시대에는 선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등이 대동강에 용선을...
금수산 영명사 (錦繡山 永明寺)
삼국시대, 평양시 금수산(錦繡山)에 있었던 고구려 동명성왕의 유지로 광개토왕 때 창건한 사찰. 영명사(永明寺)는 평양시 금수산(錦繡山)에 있는 고구려의 제1대 동명성왕의 유지로 광개토왕 때 창건한 사찰이라는 전승이 있다.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절이 있어 고려시대 왕들이 행차하여 풍경을 즐겼던 곳 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때는 31본산 중 하나였으나 한국전쟁 때 사찰이 소실되었다.이 절이 창건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구려 광개토왕 때 지어진 것으로 기록된 9개의 절 중 하나라는 전승이 있다. 동명성왕의 구제궁(九梯宮) 유지에 392년(광개토왕 2)에 절을 창건하고 아도 화상(阿道和尙)[^1]을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 변천 고려시대에는 선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등이 대동강에 용선을...
가야 혹은 금관가야를 달리 부르던 이름. 임나란 가야 혹은 금관가야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특히, 김해의 금관가야를 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사 기록에서는 3곳에서 '임나'라는 표현이 확인된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임나가라',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에는 '임나왕족', 『삼국사기』 열전 강수열전에서는 '임나가량'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임나는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서도 확인되며, 『일본서기』에서는 임나와 함께 '임나일본부'라는 표현도 다수 쓰였다.즉,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서는 '임나가라(任那加羅)',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文)」에서는 '임나왕족(任那王族)', 『삼국사기』 강수(强首) 열전에서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임나 (任那)
가야 혹은 금관가야를 달리 부르던 이름. 임나란 가야 혹은 금관가야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특히, 김해의 금관가야를 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사 기록에서는 3곳에서 '임나'라는 표현이 확인된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임나가라',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에는 '임나왕족', 『삼국사기』 열전 강수열전에서는 '임나가량'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임나는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서도 확인되며, 『일본서기』에서는 임나와 함께 '임나일본부'라는 표현도 다수 쓰였다.즉,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서는 '임나가라(任那加羅)',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文)」에서는 '임나왕족(任那王族)', 『삼국사기』 강수(强首) 열전에서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북옥저(北沃沮)의 다른 이름.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410년(영락 20)에 광개토왕이 동부여를 정벌하였을 때, 광개토왕의 은덕을 흠모하여 고구려로 내항한 5압로(鴨盧) 중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의 미구루를 매구루와 통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 말미의 수묘인연호조에 나오는 매구여민(賣句余民)의 ‘매구’를 매구루의 줄임말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두만강 하류 일대에 위치하였던 북옥저나 동부여 영역 내의 지명으로 볼 수 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지(三國志)』 -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 『광개토왕릉비』(박시형, 1966) - 「광개토왕릉비」(노태돈, 『역주한국고대금석문』1,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1992) - 「광개토왕의 웅략」(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매구루 (買溝婁)
북옥저(北沃沮)의 다른 이름.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410년(영락 20)에 광개토왕이 동부여를 정벌하였을 때, 광개토왕의 은덕을 흠모하여 고구려로 내항한 5압로(鴨盧) 중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의 미구루를 매구루와 통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 말미의 수묘인연호조에 나오는 매구여민(賣句余民)의 ‘매구’를 매구루의 줄임말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두만강 하류 일대에 위치하였던 북옥저나 동부여 영역 내의 지명으로 볼 수 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지(三國志)』 -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 『광개토왕릉비』(박시형, 1966) - 「광개토왕릉비」(노태돈, 『역주한국고대금석문』1,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1992) - 「광개토왕의 웅략」(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삼국시대의 지명.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407년(광개토대왕 17)광개토대왕이 파견한 군대에 의하여 공파(攻破)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17년(전지왕 13)에 동북 2부(部)의 민을 동원하여 쌓았다는 사구성(沙口城)과 같은 성으로 보는 설이 있다. 즉 『광개토왕릉비』의 이해 작전을 대백제전으로 보는 것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주역한국고대금석문(註譯韓國古代金石文)』 2, 1992) -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왜관계(倭關係) 기사(記事)의 검토(檢討)」(연민수, 『동국사학(東國史學)』 21, 1987) - 「광개토왕릉비를 통해서 본 고구려의 영역」(손영종, 『력사과학』 118, 1986)
사구성 (沙溝城)
삼국시대의 지명.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407년(광개토대왕 17)광개토대왕이 파견한 군대에 의하여 공파(攻破)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17년(전지왕 13)에 동북 2부(部)의 민을 동원하여 쌓았다는 사구성(沙口城)과 같은 성으로 보는 설이 있다. 즉 『광개토왕릉비』의 이해 작전을 대백제전으로 보는 것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주역한국고대금석문(註譯韓國古代金石文)』 2, 1992) -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왜관계(倭關係) 기사(記事)의 검토(檢討)」(연민수, 『동국사학(東國史學)』 21, 1987) - 「광개토왕릉비를 통해서 본 고구려의 영역」(손영종, 『력사과학』 118, 1986)
백제시대의 성. 관미성의 형세를 《삼국사기》에서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다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였는 바, 이에 따라 관미성의 위치를 강화군 교동도(橋洞島)에 비정하는 설,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인 조강에 위치한 오두산성(鰲頭山城)에 비정하는 설, 또는 예성강 하구에 비정하는 설 등이 있다. - 『삼국사기』 - 「광개토왕비문」 - 『광개토왕릉비』(박시형,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 「광개토왕릉비」(노태돈, 『역주한국고대금석문』 1,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1992) - 「광개토왕의 웅략」(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광개토대왕의 남하정복지에 대한 일고-관미성의 위치를 중심으로-」(김윤우. 『용암차문섭교수화갑기념사학논총』, 1989) - 「관미성위치고」(윤일영, 『북악사론』 2, 1990)
관미성 (關彌城)
백제시대의 성. 관미성의 형세를 《삼국사기》에서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다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였는 바, 이에 따라 관미성의 위치를 강화군 교동도(橋洞島)에 비정하는 설,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인 조강에 위치한 오두산성(鰲頭山城)에 비정하는 설, 또는 예성강 하구에 비정하는 설 등이 있다. - 『삼국사기』 - 「광개토왕비문」 - 『광개토왕릉비』(박시형,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 「광개토왕릉비」(노태돈, 『역주한국고대금석문』 1,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1992) - 「광개토왕의 웅략」(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광개토대왕의 남하정복지에 대한 일고-관미성의 위치를 중심으로-」(김윤우. 『용암차문섭교수화갑기념사학논총』, 1989) - 「관미성위치고」(윤일영, 『북악사론』 2,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