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시덕"
검색결과 총 7건
부고(訃告)는 초상이 났음을 주변에 알리는 상례의 한 절차이자 용어이다. 부고의 기원은 기원전이다. 인편으로 전달하던 부고는 인쇄술, 통신의 발달로 우편 부고, 언론 매체를 활용하는 신문 부고에서 오늘날 SNS 부고 등으로 바뀌어 왔다. 부고는 부고와 조문이라는 필요충분조건에 따라 사회관계의 척도이다. 부고는 공동체 성원의 죽음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매개체이기도 하지만, 죽음 처리에 드는 비용 부담을 공동체가 함께 나누도록 서로 연결하는 문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부고 (訃告)
부고(訃告)는 초상이 났음을 주변에 알리는 상례의 한 절차이자 용어이다. 부고의 기원은 기원전이다. 인편으로 전달하던 부고는 인쇄술, 통신의 발달로 우편 부고, 언론 매체를 활용하는 신문 부고에서 오늘날 SNS 부고 등으로 바뀌어 왔다. 부고는 부고와 조문이라는 필요충분조건에 따라 사회관계의 척도이다. 부고는 공동체 성원의 죽음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매개체이기도 하지만, 죽음 처리에 드는 비용 부담을 공동체가 함께 나누도록 서로 연결하는 문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는 경상남도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에서 1856년 최필주의 상례(喪禮) 때 제작한 4층 누각 건축형 상여이다. 이후 진주화단친목회에서 사용하다가 1994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고, 1996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상여의 구조는 4층 누각형으로 되어 있다. 상여에는 용, 시립용, 봉황, 불로초, 학, 저승새, 신선, 희광이, 연꽃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불교, 도교, 민간 신앙이 복합된 채색을 보여 준다.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 (山淸 全州崔氏 高靈宅 喪輿)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는 경상남도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에서 1856년 최필주의 상례(喪禮) 때 제작한 4층 누각 건축형 상여이다. 이후 진주화단친목회에서 사용하다가 1994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고, 1996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상여의 구조는 4층 누각형으로 되어 있다. 상여에는 용, 시립용, 봉황, 불로초, 학, 저승새, 신선, 희광이, 연꽃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불교, 도교, 민간 신앙이 복합된 채색을 보여 준다.
상례는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여 조상신으로 승화시키고 가계의 계승을 정상화하는 일생 의례로 통과 의례, 죽음 의례이다. 유적으로 보듯 상례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융화되었지만, 고려 말부터 유교식 상례가 문화적 전통으로 정립되었다. 유교식 상례는 중국의 문화였지만 우리에게 맞게 변형하여 고유문화로 전승되었다. 상례는 고인, 영혼, 조상신, 상주라는 네 주체의 의례가 상호작용하면서 3년간 진행된다. 여운으로 가장의 죽음이 가져오는 충격을 극복하고 가족의 상실에 따른 아쉬움과 슬픔을 완화했다.
상례 (喪禮)
상례는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여 조상신으로 승화시키고 가계의 계승을 정상화하는 일생 의례로 통과 의례, 죽음 의례이다. 유적으로 보듯 상례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융화되었지만, 고려 말부터 유교식 상례가 문화적 전통으로 정립되었다. 유교식 상례는 중국의 문화였지만 우리에게 맞게 변형하여 고유문화로 전승되었다. 상례는 고인, 영혼, 조상신, 상주라는 네 주체의 의례가 상호작용하면서 3년간 진행된다. 여운으로 가장의 죽음이 가져오는 충격을 극복하고 가족의 상실에 따른 아쉬움과 슬픔을 완화했다.
시묘란 부모상을 당하여 상주가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놓고 묘소를 돌보며 삼년상을 치르던 일이다. 시묘는 예의 규정은 없으나, 공자 때부터 있었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효행의 덕목을 내세워 유교식 상례를 권장하고자 시행하였다. 시묘의 거처인 여막은 초막이나 묘 옆에 지은 재실도 가능했다. 조선 후기 유교식 상례의 반곡(反哭)이 보편화되면서 궤연에 거적을 두른 여막에서 시묘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시묘는 신주를 중시하는 중국식과 혼백도 중시하는 한국식이 대립하는 논쟁도 있었지만, 양쪽을 함께 중시하는 한국식 의례로 정착되어 지속되었다.
시묘 (侍墓)
시묘란 부모상을 당하여 상주가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놓고 묘소를 돌보며 삼년상을 치르던 일이다. 시묘는 예의 규정은 없으나, 공자 때부터 있었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효행의 덕목을 내세워 유교식 상례를 권장하고자 시행하였다. 시묘의 거처인 여막은 초막이나 묘 옆에 지은 재실도 가능했다. 조선 후기 유교식 상례의 반곡(反哭)이 보편화되면서 궤연에 거적을 두른 여막에서 시묘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시묘는 신주를 중시하는 중국식과 혼백도 중시하는 한국식이 대립하는 논쟁도 있었지만, 양쪽을 함께 중시하는 한국식 의례로 정착되어 지속되었다.
이장은 기존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장사하는 의례이다. 개장, 천장, 면례, 천릉 등이라고도 했다. 이장 이유는 무덤에 이상이 생겨 시신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을 때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이장 기사가 등장한다. 조선시대가 되면 훼손, 묫자리 소송, 풍수 등 다양한 이유로 이장이 빈번하였고, 19세기에는 예서에 개장(改葬)이라는 항목이 등장한다. 이장은 장사와 유사한 절차로 진행된다. 현대사회의 이장은 흩어진 무덤을 한곳에 모으거나 자연장으로 분묘 관리의 편의성을 도모하고 있다. 이장은 무덤을 중시하는 관념에서 나온 문화이다.
이장 (移葬)
이장은 기존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장사하는 의례이다. 개장, 천장, 면례, 천릉 등이라고도 했다. 이장 이유는 무덤에 이상이 생겨 시신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을 때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이장 기사가 등장한다. 조선시대가 되면 훼손, 묫자리 소송, 풍수 등 다양한 이유로 이장이 빈번하였고, 19세기에는 예서에 개장(改葬)이라는 항목이 등장한다. 이장은 장사와 유사한 절차로 진행된다. 현대사회의 이장은 흩어진 무덤을 한곳에 모으거나 자연장으로 분묘 관리의 편의성을 도모하고 있다. 이장은 무덤을 중시하는 관념에서 나온 문화이다.
장례는 상례의 시신을 처리하는 절차인 장사를 예를 갖추어 표현한 말로 현대 사회에서 상례를 대신하는 용어이다. 장례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선사시대의 고인돌, 고분 등은 장례의 증거물이다. 장례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였지만, 상례를 대체하는 용어로 장례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것은 현대의 일이다. 장례 전문가에게 위임된 현대의 장례는 고인의 시신 처리, 조상신 승화, 상주의 일상 복귀 과정이 품고 있는 상례의 의미와 상징, 한국인의 생사관 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장례 (葬禮)
장례는 상례의 시신을 처리하는 절차인 장사를 예를 갖추어 표현한 말로 현대 사회에서 상례를 대신하는 용어이다. 장례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선사시대의 고인돌, 고분 등은 장례의 증거물이다. 장례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였지만, 상례를 대체하는 용어로 장례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것은 현대의 일이다. 장례 전문가에게 위임된 현대의 장례는 고인의 시신 처리, 조상신 승화, 상주의 일상 복귀 과정이 품고 있는 상례의 의미와 상징, 한국인의 생사관 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피막은 전염병이나 의례의 부정을 예방하고자 병자나 임산부를 마을에서 격리하고자 임시로 마련한 거처이다. 이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동제의 부정을 막아, 사전에 부정을 예방하여 주민의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산막(産幕), 해막(解幕), 병막(病幕) 등이라고도 한다. 과학 기술과 의술의 발달로 사라졌다.
피막 (避幕)
피막은 전염병이나 의례의 부정을 예방하고자 병자나 임산부를 마을에서 격리하고자 임시로 마련한 거처이다. 이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동제의 부정을 막아, 사전에 부정을 예방하여 주민의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산막(産幕), 해막(解幕), 병막(病幕) 등이라고도 한다. 과학 기술과 의술의 발달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