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막(避幕)은 전염병이 있을 때나 의례를 행할 때 부정을 예방하고자 환자나 임산부를 마을에서 격리할 때 사용하는 임시 거처용 움막이다. 이는 지역에 따라 산막(産幕) 또는 해막(解幕)이라고도 한다.
전통 사회에서는 마을신의 노여움을 달래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동제(洞祭)를 지낸다. 마을신을 노하게 하는 부정에는 사람과 동물의 출산인 산 부정과, 사람이 죽는 죽은 부정이 있다. 초상 당하는 일은 예측할 수 없지만, 출산은 예측할 수 있어 동제 20일 전쯤에 해산이 가까운 임산부를 마을 밖에 마련된 피막으로 내보내 부정을 막는다. 이 기간 동안 임산부는 마을에서 마련한 산막에서 해산한 후, 3일 정도가 지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산막은 마을 제의 부정을 방지하고자 임산부를 잠시 피난하게 하는 임시 거처이기에 움막처럼 지었다가 사용 후 헐어 버리기도 한다.
산막 또는 해막은 서해안 도서 지역에서 1950년대까지도 많이 있었는데, 외연도에서는 움막 같은 해막에 20여 명이 모였다는 보고도 있다. 고대도에 사는 안ㅇㅇ 씨는 자신이 이 산막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1973년에 조사된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장고도의 해막은 원래 대머리라는 곳에 있는 김ㅇㅇ 씨의 개인 가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산막에는 산막을 지키는 산막지기가 있었고, 600여 평의 산막답(産幕沓)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산막은 1960년대 독립 가옥 집단 이주 시책과 새마을운동으로 헐리게 되었다. 이에 1973년 삽시도리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장고초등학교 옆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은 마을과 당제를 지내는 당산(堂山)에서 보이지 않는 곳이다. 새로 지은 산막은 온돌방 2개에 부엌 하나의 구조인데, 폭은 2.45m이고, 길이는 6.17m의 시멘트 블록에 슬레이트 지붕이다.
같은 해에 충청남도 보령 원산도 진촌의 해변인 애막고랑이라는 곳에 있었던 해막이 조사되었다. 음력 12월 초부터 1월 중순 사이에 출산이 예정된 임산부는 모두 해막으로 피신하였다가 거기서 해산한 후 마을제가 끝나면 귀가하였다고 한다.
1993년에 조사된 충청남도 보령 외연도의 해막은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규모는 2칸이다. 해막에는 많으면 3~4명 정도가 함께 했다고 한다. 해막에서 해산한 아이를 해막동이라 하고, 마을에 돌아오면 먼저 갯벌의 흙을 아이 이마에 찍어 부정을 막았다고 한다.
이러한 해막은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서해안 도서 지역에 많았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외딴집 폐쇄 정책 등으로 마을제와 함께 모두 사라졌다.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환자를 격리하는 피막이라는 용어는 전염병이나 부정을 피한다는 의미로 편의상 사용된 조작적 용어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일기 등의 기록에 피막이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병막이란 단어가 태종 16년(1416)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 등장하여 이후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용어로 사용된다. 병막의 관리는 비변사, 진휼청, 한성부 등에서 하였다. 하나의 병막에 1~2명이 거주하면서 병막의 신구(新舊) 상황, 환자 수, 향차, 병사 등의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여 보고하였다. 병막을 지키는 것은 군영의 일이었다.
1788년(정조 12) 5월에서 6월 사이에 서울에서 역병 의심 환자가 발생하였다. 한성부에서 5일마다 역병의 상황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그중 5월 24일자 보고에는 중부는 환자 96명을 교외에 있는 병막으로 출막(出幕)하였고, 동부는 132명을 58곳에, 서부는 163명을 97곳에, 남부는 660명을 272곳에, 북부는 320명을 출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활인서에는 12명, 서활인서에는 17명의 환자를 격리하였다고 한다.
5월 30일자 보고서의 별단(別單)에 따르면,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중부에서 역병에 걸린 125명을 출막하였는데, 이는 교외에 있는 병막으로 내보냈다는 말이다. 동부는 환자가 193명이었는데, 회복하여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이 7명, 사망한 사람은 2명이었고, 병막은 모두 96곳이었다. 서부는 환자 253명 중 회복한 사람이 34명, 사망한 사람이 4명, 병막은 모두 118곳이었다. 남부는 환자 807명 중 회복자 18명, 사망자 13명, 출막한 장소는 339곳이었다. 북부는 환자 362명 중 회복자 11명, 사망자 4명, 출막한 장소는 153곳이었다. 또한 동활인서는 23명, 서활인서는 28명을 출막하였다고 한다.
병막은 기존의 것을 사용하기도 하고, 철거하기도 하며 새로 짓기도 했다. 『일성록(日省錄)』 「1788년 5월 30일」에 따르면, “동부와 남부는 구막(舊幕)이 397곳, 신막(新幕)이 51곳이며, 그중 3곳은 철거하여 현재 병막은 445곳이다.”라고 하였다. 빠진 곳이 있어 확실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서울 외곽에는 수백 곳의 병막이 있었다.
당시 비변사 낭청(郎廳)이었던 유상엽(柳相曄)의 수본(手本)에는 병막의 형태와 운영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병막은, 거적으로 지붕을 만들어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고, 바닥에는 거적을 깔아 침수를 면하도록 하였다. 그때는 비변사와 진휼청이 공조하여 병막을 관리하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병막을 빌려서 활용하였다. 노상추(盧尙樞, 1746~1829)는 정조 17년(1793) 4월 5일 하인이 병에 걸려 이웃의 막차(幕次)로 보냈는데, 동(銅) 120을 냈다고 한다. 또 마을 주민이 스스로 병막을 지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묵재일기』에는 명종 14년(1559) 1월 21일 “마을 사람들이 우물가에 병막을 지었으니 판관에게 알려 옮기게 해달라고 하여 바로 편지했더니 처리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활인서(活人署)에서는 피병소(避病所)를 설치하여 의약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는 전염병을 막는 방역책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피병소를 한양에서는 성 밖에, 지방에서는 인적이 드문 산속이나 들판에 설치했는데, 피병소는 일반인보다는 왕실이나 관료들의 질병 피난처였다.
18세기 활인서와 혜민서의 질병 치료는 전염된 환자를 일반인들로부터 격리하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하멜은 “환자가 생기면 즉시 그들을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집에 데려다가 격리한다.”라고 하였다. 환자를 격리하는 일은 출막(出幕)이라 하였다. 제주도에서는 해변에 구질막(救疾幕)을 설치하여 나병 환자를 치료하였는데, 기건(奇虔, ?~1460)이 제주 목사 때 설치하여 칭송받았다.
『묵재일기(墨齋日記)』에는 병을 피하는 일을 피접(避接)이라고 하였다. 명종 7년(1552) “날이 저문 후에 피접하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 처남의 댁을 알현하고 조문했다.”라는 등의 피접 기사가 많다.
한편, 피병소 제도는 1930~4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최병채일기(崔炳彩日記)』에서 1936년 6월 3일자에 “병자 조사 후 빈집을 빌리려고 하였는데, 조상돈이 살던 옛집을 허락받아 임시 병막으로 사용하려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49년 12월 9일에는 “예방 접종을 한 후에, 벌채장의 기숙사를 임시 병막으로 하여 환자를 수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방 접종이 도입되었던 근대까지도 피병소 제도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피막’이란 제목으로 양반, 청상과부, 무당, 피막지기가 등장하는 영화가 제작되어 인기와 함께 많은 상을 받았다. 피막은 전염병이나 부정을 예방하고자 당사자를 격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예방책이었다. 그러나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이러한 피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