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여는 1856년(철종 7)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거주하던 전주최씨 통덕랑공파(通德郞공파) 21대손 최필주(崔必周, 1796~1856) 공의 초상(初喪) 때 운구(運柩)하고자 특별 제작한 상여이다. 당시 산청 만석꾼이었던 최필주의 아들 동한(東漢)이 300냥을 주고 통영에 있는 김씨라는 조각공을 초청하여 6개월에 걸쳐 제작하였다.
이 댁이 고령댁(高靈宅)이라 불리게 된 것은 최필주의 현손인 24세 최선호(崔璇鎬)가 고령군수(高靈郡守)를 지냈기 때문이다. 최선호는 1919년 ㈜백산무역의 대주주이기도 하였다.
1933년 4월 17일 대동공업사 사장이던 진주화단친목회 김삼만 회장이 정조(正租) 15석을 주고 이 상여를 사서 진주화단친목회 회원의 초상 때 사용하였다. 1982년 5월 제32회 진주 개천예술제에서 개최한 ‘경남상여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것이 알려져 같은 해 11월 MBC문화방송의 요청으로 출상 의식을 재현하고, 그해 11월 23일 ‘레이다 11 묘지 강산’에 방송되었다.
그 후 진주화단친목회 회원 수가 줄어 상여를 맬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여 사용하지 않다가 1994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이를 세척 및 수리하고, 상세한 조사를 거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신청하여 1996년 12월 3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상여의 형태는 4층 누각식 건물 형태이다. 상여의 몸체 크기는 길이 263cm, 폭 65cm, 높이 170cm이다.
1층과 2층은 조립식으로 해체 조립이 가능하나, 3층과 4층은 고정되어 있다. 아래 2층은 난간과 풍판을 둘러 단을 만들고, 상부 2층은 누각식 건물 형태이다. 1층은 영구를 안치하는 소방상이고, 그 바깥 아래쪽에는 난간을 두르고, 바깥에는 검은색 휘장인 벽적(襞積)을 둘렀다. 그 표면에 가지각색의 천을 잘라 부채꼴 모양으로 늘어뜨린 여러 개의 진용(振容)을 달고, 삼색 띠를 둘렀다. 난간 궁판 위에는 19명의 상여를 장식하는 인형인 시립용(侍立俑)을 세웠는데, 고인의 저승길을 배웅하는 형상이다. 표정과 손 모양이 다양하게 표현되었고, 치마를 입었으나 2명은 남자이다. 2층은 앞뒤 바닥에 판을 대고 여기에 청룡과 황룡이 용트림하는 정자용(丁字龍)을 세웠다. 상하로 짝을 이룬 청룡과 황룡을 좌우 바깥으로 배치하고, 앞으로 나온 백룡(白龍)의 턱에는 대봉유소(大鳳流蘇)를 달았다. 네 모퉁이 바닥에 봉황을 세우고 턱에 대봉유소를 걸었다. 난간 궁판에 16명의 시립용을 세웠는데, 2명은 남자이다.
3층 평방에는 12지신을 배치하고, 벽면은 장생 동물과 신선, 불로초, 모란 등을 뚫어새기거나 그렸다. 상부에는 창방보를 걸고 4각 주두를 설치하였으며, 그 위에 연목과 부연을 건 후 평고대를 설치하여 누각식 건물의 지붕을 형상화했다. 앞과 뒤에는 2층보다 작은 규모의 정자용을 세우고 2층보다 작은 봉황을 세우고 대봉유소와 종을 달았다. 3층 지붕 위에는 잡귀를 막는 희광이를 앞뒤로 세웠다. 4층에는 벽면 없이 평방을 설치하고 그 위에 2줄목 다포를 눌렀다.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올리고 다시 그 위에 서까래와 부연을 설치하고 지붕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기와지붕을 형상화하였다. 용마루에는 5마리의 날개를 편 저승새와 추녀마루 끝 4곳에는 각 1마리씩 날개를 접은 4마리의 저승새를 배치하였다. 3층과 4층 벽면에는 붉은색 천을 둘러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용과 봉황, 시립용, 망나니, 풍판을 고정하는 병아리 등의 입체 조각과 벽면의 뚫어새김과 그림, 단청의 기법이 뛰어나고, 섬세하다.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는 제작 연대가 명확하고 규모가 웅장하며 가구 방법과 채색, 조각이 정교하다. 예서에서 규정하는 단층형 상여와는 다른 건물 형태가 특징이다. 상여는 용, 시립용, 봉황, 불로초, 학, 공작새, 신선, 희광이, 연꽃 등의 조각과 채색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불교, 도교, 민간 신앙 등의 사상이 섞여 있음음을 보여 준다. 상여는 유택(幽宅)이라 하듯이, 상여에는 고인을 위한 상주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상여에는 상례(喪禮)의 문화적 전통인 유교식 상례에 다양한 종교적 이념과 고유문화가 융화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인의 저승관, 상여, 공예, 조형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