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은 기존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장사하는 의례이다. 개장, 천장, 면례, 천릉 등이라고도 했다. 이장 이유는 무덤에 이상이 생겨 시신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을 때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이장 기사가 등장한다. 조선시대가 되면 훼손, 묫자리 소송, 풍수 등 다양한 이유로 이장이 빈번하였고, 19세기에는 예서에 개장(改葬)이라는 항목이 등장한다. 이장은 장사와 유사한 절차로 진행된다. 현대사회의 이장은 흩어진 무덤을 한곳에 모으거나 자연장으로 분묘 관리의 편의성을 도모하고 있다. 이장은 무덤을 중시하는 관념에서 나온 문화이다.
이장(移葬)이란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의례이다.
『상변통고(常變通攷)』 「개장」 조에는 고대 중국에서부터 조선의 개장을 정리하여 이장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이에 따르면 “ 『의례』 「상복(喪服)」 [기(記)]의 주에 개장은 무덤이 사고로 무너져 시구(屍柩)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을 때 한다. ‘개장’이라 말한 것은 관(棺)과 기물이 훼손되어, 장사 때처럼 고쳐〔改〕 설치함을 밝힌 것이다. 한문공(韓文公)은 개장은 산이 무너지거나 물이 솟아나 그 무덤을 훼손하거나, 또는 장사를 치를 적에 예를 갖추지 못했을 때 한다. 문왕(文王)이 왕계(王季)를 개장한 것은 물이 그 무덤을 침식하였기 때문이고, 노나라 은공(隱公)이 혜공(惠公)을 개장한 것은 송나라와 전쟁을 벌인 데다가 태자가 어려서 장사를 치를 적에 미흡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했던 것이 이것이다. 주자(朱子)는 천장(遷葬)하는 일은 쉽게 해서는 안 될 듯하다. 만약 그만둘 수 있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는 무덤이 무너져 시신과 관이 없어지게 될까 우려하여 무덤을 고치는 것인데, 풍수설에 현혹되어 이유 없이 천장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장을 표현하는 용어는 개장(改葬), 천장이 있고, 면례(緬禮), 면봉(緬奉), 면리, 천릉(遷陵)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장은 단순히 묘를 옮긴다는 뜻이고, 개장은 묘를 고쳐서 새로 만든다는 뜻이이어서 묘를 옮기지 않을 수도 있다. 천장은 옮긴다는 의미와 시신을 임시로 매장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화장 후 원찰(願刹)에 권조(權厝)하였다가 정식으로 매장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조선시대에 천장은 이장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면례와 면봉, 면리는 무덤을 살펴서 문제가 발생하면 옮겨서 장사한다는 뜻이다. 매장 후 약 10여 년이 지나 무덤을 확인하여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것을 일컫는 용어이다. 면리는 면례에서 소리가 변한 말이다. 천릉은 능원(陵園)을 이장하는 것을 뜻한다. 『상변통고』에는 이장과 관련된 용어로 권장(權葬), 여장(旅葬), 초혼장(招魂葬), 분묘화(墳墓火), 분묘훼(墳墓毁), 수묘(修墓) 등을 개장 항목에 부기하였다.
이장의 이유는 자연재해, 산송(山訟), 토지 매매, 재산권 문제, 문중 산의 사유화, 왕릉의 경내, 금산지역(禁山地域), 도로, 풍수지리 등 다양하다. 왕실에서는 여기에 천도(遷都)가 추가된다.
조선 후기가 되면 『상변통고』,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의 예서에 개장이 정식 항목으로 등장한다. 또한 『면례의절(緬禮儀節)』이라는 책이 발간될 정도로 이장의 수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장이 중요한 의례로 등장한 것은 조상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는 체백(體魄)이 묻힌 무덤보다 영혼이 깃든 신주를 중요시해 사시제(四時祭)가 제사의 핵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주와 함께 무덤도 존중하여 사시제 대신 묘제(墓祭)를 중요한 제사로 여겼다. 이장은 이러한 조상 관념에서 나온 문화이다.
『의례』 「상복」 조에 개장의 개념을 설명하였고, 『문헌통고』에 선조(宣祖)의 안릉(安陵)을 하남(河南) 공현(鞏縣)으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듯이 중국에서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려사』에는 현종(顯宗) 3년(1012) 강조(康兆)에게 살해당한 목종(穆宗)의 공릉(恭陵)을 이장하여 의릉(義陵)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천장은 숙종(肅宗) 2년(1096) 고려 묘지명(墓誌銘)에 처음 등장한다. 태종 10년(1410)에는 목조 이하의 능을 개장하면서 개장할 때 입는 상복을 시마복(緦麻服)으로 정하였다.
조선에서는 ‘이장’이라는 용어가 태조 6년(1397)을 시작으로 80여 회 이상, 개장은 태종 10년(1410)부터 130회 이상, 천장은 태종 9년(1409)부터 180회 이상, 면례는 현종 14년(1673)부터 58회가 등장한다. 또한 태종 10년(1410)부터 천릉과 관련되는 기사가 380회 이상 나타난다. 그중에는 천릉도감(遷陵都監), 천릉사(遷陵使), 천릉시위사(遷陵侍衛使) 등 천릉에 필요한 임시 조직도 있었다. 선조 26년(1593)에는 개장도감(改葬都監)과 개장에 대한 의주(儀註)를 마련할 정도로 천릉은 빈번하면서도 큰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1535년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모친의 시묘살이를 하면서 영동에 있던 부친의 묘소가 왕릉으로 수용되면서 이장하는 과정을 『묵재일기(墨齋日記)』에 남겼다. 이문건은 이장에 대한 예서가 없어 『가례의절』을 필사해 와서 참고하였다고 한다.
한편,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해남윤씨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집안에서 행한 이장은 정계 진출과 낙향, 분묘 수호 등의 이유로 묘소를 멀리 분산한 이장이거나, 가까운 곳으로 이장한 사례이다. 그중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무려 7차례나 천장하였는데, 권조, 고인의 상경, 풍수적 불길, 훼손, 종가의 낙향과 묘지 수호, 묫자리 소송 등 이유가 다양하였다. 특히 이장이 묫자리 소송의 주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함에도 민간에서는 1830년에 간행된 『상변통고』에 비로소 개장 의례가 등장한다. 이어 『사례편람』(1844)에 『가례의절(家禮儀節)』을 인용하여 「개장」을 정식 의례로 다루었다. 다음으로 『광례람(廣禮覽)』(1893), 『성재집(省齋集)』(1903)에도 개장이 정식 항목으로 되어 있다. 편찬자와 편찬 연대 미상의 『면례의절』이라는 책도 이 시기에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사례편람』의 개장과 유사한 면례 절차를 제시하고, 여러 집안의 개장 의절을 널리 살펴본 ‘제가개장상설박고(諸家改葬詳說博考)’와 여러 학자의 문답을 부록으로 실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8조 3항에 개장은 반드시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도시화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에서 일상생활의 변화는 흩어져 있는 조상의 무덤 관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국 평균 화장률이 90%에 달하면서, 기존의 무덤을 한군데로 모아 문중이나 가족 묘지를 조성하고자 이장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또한 기존 무덤을 개장하여 화장한 후 ‘자연장’이나 ‘봉안 묘’에 모시는 이장도 많아졌다. 이러한 이장 수요에 따라 이를 전문으로 사는 대행업체가 흥하면서 이장의 절차도 간소화되었다.
전통적인 이장은 상례의 장사 절차와 유사하다. 『상변통고』와 『사례편람』에 따르면 이장이 결정되면 가장 먼저 묘터를 잡는다. 이어 관, 염상(斂狀), 염을 새로 할 때 시신을 묶는 효(絞)와 같은 용품을 준비한다. 다음 절차로 이전할 묘역의 광중(壙中)을 파는 등 장지를 정비한다. 개장 하루 전에 사당에 고한다. 개장하는 날 복인들이 모두 시마복을 입고 위차(位次)로 나가고 그 외는 소복에 베 두건을 쓴다. 축관이 토지신에게 제사하고, 개장할 묘소에 제사하고 무덤을 연다. 영구를 들어내어 미리 마련한 장소에 안치하고 전(奠)을 차린다. 새 관을 들여놓고 새로 소렴과 대렴을 한다. 마치면 새 영구를 상여에 모시고 발인(發靷)한다. 새 묘소에 도착하면 대기소에 영구를 모셔 영좌를 설치하고 조석전과 상식을 드린다. 무덤 왼쪽에서 토지신에게 제사하고, 하관 등의 절차는 장사 때처럼 한다. 장사를 마치면 전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사당에 고하고, 신주를 대청으로 모셔 우제를 지낸다. 3개월이 지난 네 번째 달 초하루에 허위(虛位)를 마련하여 곡하고 복을 벗는 것으로 개장을 마친다.
개장 절차는 전통 상례의 장사와 거의 같지만, 목욕시켜 수의를 입히는 습(襲)이 없고, 상복도 간소화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도시 개발이나 도로 개설이 이장의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개장 유골의 화장을 전제로 한다. 이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서 매장을 제한하였고, 관리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화장묘나 봉안당, 자연장 형태로 이장하기 때문이다. 이장 전문가가 전통 개장 절차를 현대에 맞게 축소하여 진행하므로 상복을 입는 등의 형식은 사라졌다.
이장은 무덤의 물리적 훼손이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무덤의 보존이 어려울 때 행하는 무덤 관련 문화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매장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무덤 관리와 보존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만약 문제가 생겨 무덤을 이장하는 것은 다시 장사를 지내는 일과 같아 장사와 버금가는 의례로 처리하였다. 조선 중 · 후기에 우리나라의 예법에 관한 책에서 개장을 정식 항목으로 다루게 된 것은 다양한 이유로 개장을 빈번하게 행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현대 사회의 이장은 무덤의 시신을 화장한 후 봉안, 자연장 등으로 처리한다. 이는 무덤의 보존보다는 관리의 편의성과 조상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