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란 부모상을 당하여 상주가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놓고 묘소를 돌보며 삼년상을 치르던 일이다. 시묘는 예의 규정은 없으나, 공자 때부터 있었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효행의 덕목을 내세워 유교식 상례를 권장하고자 시행하였다. 시묘의 거처인 여막은 초막이나 묘 옆에 지은 재실도 가능했다. 조선 후기 유교식 상례의 반곡(反哭)이 보편화되면서 궤연에 거적을 두른 여막에서 시묘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시묘는 신주를 중시하는 중국식과 혼백도 중시하는 한국식이 대립하는 논쟁도 있었지만, 양쪽을 함께 중시하는 한국식 의례로 정착되어 지속되었다.
시묘(侍墓)는 돌아가신 부모의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묘를 돌보는 적극적인 효의 실천이다. 그래서 이를 여묘살이, 시묘살이라고 하였다. 기록에는 여묘삼년(廬墓三年), 여총삼년(廬塚三年), 여묘(廬墓), 여묘종제(廬墓終制), 여묘복삼년(廬墓服喪三年), 거려(居廬), 여분삼년(廬墳三年), 여묘진제(廬墓盡制), 묘려(墓慮), 지복시묘(持服侍墓), 수려진제(守廬盡制), 여우묘측(廬于墓側), 여분삼재(廬墳三載), 삼년시묘(三年侍墓) 등 다양하다.
시묘는 부모를 돌아가시게 한 죄인으로서 3년간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관념이 낳은 삼년상의 실행 방법이었다. 『의례(儀禮)』에 “효자는 의려(倚廬)에 거처하는데, 거적 위에서 흙덩이를 베고 자며, 질(紩)과 대(帶)를 벗지 않고, 우제(虞祭)를 지낸 후 기둥으로 들보를 받치며 자리를 깔고 잔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예론(禮論)의 근거가 된다.
이황(李滉, 1501~1570)은 “한나라 당나라 이후에 ‘거려(居廬)’라는 말이 사라져 여묘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이 때문에 여묘가 풍속이 되자 반혼(返魂)하는 예가 사라져 한탄스럽다.”라고 하였다. 이의조(李宜朝)는 『가례증해(家禮增解)』에서 예학자의 여묘 예설을 소개하고, “혹시 독자(獨子)라면 궤연(几筵)을 모실 사람이 없으므로 여묘는 불가하다. 주자(朱子) 역시 한천(寒泉)에서 거상(居喪)할 때 독자였다. 도암(陶菴)은 묘(廟)가 중요하므로 예를 안다면 장사 후 반혼해야 하기에 시묘하지 못한다. 형제가 있다면 맏아들은 궤연을 모시고 둘째 아들은 여묘하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하였다.
고려나 조선시대 기록에 보이는 시묘는 대부분 효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래서 공자가 죽었을 때 6년이나 시묘한 자공(子貢, BC 520456)이나 고려말 백일탈상 하는 사대부와 달리 독자적으로 시묘한 신진 유학자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사례로 유교의 삼년상을 권장하였다. 정몽주, 염신약(廉信若, 1118~1192), 배홍식(裵弘湜), 송윤(宋倫) 등은 국가에서 시묘한 사람을 찾아 포상한 사례들이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최누백(崔累伯)이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 복수한 다음 3년간 여묘에서 살았다는 설화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역설적으로 유교 이념을 실천하고자 권장한 시묘는 『가례(家禮)』, 『가례집람(家禮輯覽)』 등의 예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상변통고(常變通攷)』에서는 ‘여묘지비(廬墓之非)’라는 조목을 두어 여묘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유교식 상례(喪禮)는 장지에서 제주(題主)한 신주(神主)를 반혼하여 궤연(几筵)에 모시게 되어 있다. 그런데 시묘하면 반혼의 시기가 시묘살이를 마친 3년 후가 되어 유교식 예법을 어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게다가 반혼 후 삼년상의 예법을 지키지 않는 폐단이 발생하자 관리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학자들은 예법도 중요하지만, 삼년상이라는 예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바에는 시묘라도 하여 효도를 하라고 주장하였다. 이황은 장사 후 신주를 집으로 모시는 반혼이 올바른 예법이라고 하면서도, 반혼 후 사람들이 예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시묘의 혼잡보다 더 나쁘므로 차라리 시묘하여 반혼의 문제점을 줄이자고 하였다. 이이(李珥, 1536~1584)는 "장사 후 반혼하는 집이 많은데, 이는 정말 바른 예이다. 그런데, 반혼 후 각기 제집으로 돌아가 처자와 한 데 거처하면서 예법을 크게 무너뜨리니 한심하다. 어버이상에는 반혼을 하는 등 예에 따라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야 하나, 만약 그렇지 못하면 옛풍속에 따라 시묘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시묘를 하게 되면 반혼뿐만 아니라 부제(祔祭)의 시기도 늦어져 유교식 예법에 어긋나게 된다. 부제는 졸곡(卒哭) 다음에 지내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시묘를 하면 시묘가 끝나는 3년 후에나 가능하다. 이정회(李庭檜, 15421612)가 쓴 『송간일기(松澗日記)』에는 1578년 5월 1일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대상(大祥)을 치른 1580년 5월 1일 3년째를 시작하는 날 여막에 있던 신주를 모셔 와 다음날 사당(祠堂)에 모셨다고 한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도 모친상의 대상 후 신주를 합제(合祭)하였고, 황윤석(黃胤錫, 1729~1791)도 부친상 때 대상을 마친 후 부제를 지냈다. 이렇듯 조선에서는 부제 역시 한국 상황에 맞게 3년 후에 지내는 것을 인정하여 시묘와 반혼이 공존하게 되었다.
한편, 시묘할 때 거처하는 여막의 구조를 보여 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가례집람』 「도설(圖說)」에 <의려도(倚廬圖)>가 그려져 있다. <의려도>에는 동쪽 벽의 서쪽에 기대어 지은 움막을 그렸는데 풀로 거적을 엮어 덮는다고 하였다. 복인(服人)이 거처하는 여차(廬次) 역시 오두막처럼 지었기에 여막의 형태를 유추할 수는 있다. 세종 4년(1422) 기록에 “임금이 광연루 동쪽에 의려(依慮)를 설치하고 거처하였는데, 한 칸 크기로 사면을 섶이 붙은 띠로 이었다.”라고 하였고, 영종 52년(1776)에는 “여묘할 곳은 세 칸 초가로 세우라.”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볼 때 국상의 여막은 1칸이나 3칸 초가였다.
최근 여막을 선사 시대 움집 형태로 추측하였지만, 오승환은 기록과 복원한 사례를 비교 연구하여 여막은 비교적 간단한 목재에 초본류를 엮어 지상에 세운 임시 건조물로 움집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19세기 말 풍속화가인 기산 김준근(金俊根)의 풍속화에 효자가 시묘하는 그림이 나오는데, 꽤 큰 초가이다. 이정회는 모친상에 시묘하면서 손님도 맞이하였고, 추운 겨울에는 노비들이 수시로 숯과 나무를 가져다주었다.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여막은 묘소 아래에 있고 묘소 바로 옆에 취사가 가능한 사토막(沙土幕)이 있었으나 추위로 인한 피해, 감기 등의 병치레 기록이 많았다. 거창 김근추(金謹樞, 1747~1814)의 『여묘일기(廬墓日記)』에는 여막의 침수, 태풍, 벌레, 습기, 여막 붕괴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묘지 근처의 임시 거처로서 여막은 자연재해에 취약하며, 추위와 더위에도 매우 약한 구조여서 아무리 효자라도 그 고통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기에 따르면 시묘하는 중에도 첫째, 묘소 관리와 삼년상의 기본 예절을 수행하였다. 둘째, 조문객을 맞이하였다. 셋째, 유학 관련 서적을 읽는 등 유학자의 활동을 이어간다. 넷째, 서원 혹은 사당 건립 같은 위선 사업을 추진하는 등 유학자로서 일상생활도 이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43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부친의 행장과 묘지문을 작성하였고, 『상례고증(喪禮考證)』을 편찬하였다.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역시 60세에 모친상을 당해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상례고증(喪禮考證)』 등을 찬술하였다. 관직을 사직한 후 시묘삼년이란 시간은 유학의 지식을 넓히고, 위선 사업 등 미뤄 두었던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시묘의 거처인 여막은 두 번의 여름과 겨울을 나야 하므로 최소한 식사와 취침을 할 수 있고, 겨울의 한파를 막을 수 있는 난방 시설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여러 장애 요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시묘는 중국 한나라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 정사에서 발견되는데, 나말려초에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불교 국가였지만, 국가적으로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하여 효(孝)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상례 제도를 기반으로 한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시묘 기록이 발견된다. 『고려사』 「지」39 「형법」2와 『고려사절요』에 성종 6년(987) 7월 “3년간 여묘를 하면 40세가 넘어 천민의 신분을 벗게 해 주라.”라고 교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당시 시묘는 주인을 대신하여 뱃길로 전쟁터에 나가는 것에 비교될 만큼 힘든 고행이었다. 그래서 고행을 대신했던 노비를 국가에서 포상하는 정도에서 시묘를 인정하였다. 이는 대리 시묘의 문제가 있었으나 효행 장려 정책과 시묘의 윤리적 성격을 인정하는 맥락에서 수용되었다. 개인의 효행을 국가 차원의 윤리로서 포섭하는 근거를 제공했던 『효경』의 윤리에 따라 효행과 예법의 직접적인 적용보다는 정책과 포상이라는 맥락에서 시묘를 유연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리 여묘가 성행되는 가운데서도 인종 대부터 개인의 직접 시묘가 등장한다. 인종 15년(1137) 최루백(崔婁伯), 인종부터 의종대까지 염신약(廉信若), 명종 12년(1182) 손응시(孫應時), 손시양(孫時揚), 명종대 위초(尉貂), 하광신(夏光臣) 등 시묘한 개인에게 국가에서 정려(旌閭)로 포상하였다. 이들은 지방 유력자나 하급 관리였다. 인종대 군인들의 부모상에 100일 휴가를 주는 급가(給暇)와 같은 국가의 효행 장려 정책에 발맞춘 효행 의식이 시묘를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식 상례를 대체하지 못하고 병존하고 있었다.
고려 후기가 되면 3일장, 대리 시묘를 단죄하고 효행을 포상하는 수단으로 시묘를 활용하였는데, 이것이 직접 시묘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조간(趙簡), 정습인(鄭習仁), 정몽주,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등 직접 시묘한 50여 명 이상이 포상받는다. 신분상으로도 고관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고려 후기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 유학자들이 효행의 본격화를 기반으로 한 시묘의 확산은 성리학의 부상을 이끌었다.
급가 100일 이후에는 심상을 하지 않았던 기복제(起復制)를 악습이자 비례(非禮)로 본 이색(李穡, 1328~1396)은 시묘로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색은 송대에 본격화된 가묘(家廟) 중심의 상례 문화를 이해하고 고려에서 이를 절충하고자 하였다. 정신은 어디든지 갈 수 있기에 자손이 있는 곳이 바로 신이 의지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조석으로 곡하며 올리는 조석곡전을 반드시 집이 아닌 산야(山野)에서 올려도 잘못이 없다고 하였다. 예법이 완전히 무너진 이때 지극한 심정을 쏟고, 부모의 품을 벗어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은 시묘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도 포상하고, 사람들이 그를 효자라고 역설하였다. 유교식 상례를 받아들이지만, 송나라와는 다른 절충안을 도입하면서 시묘가 확산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충 방법은 조선 초기에는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에서는 숭유억불이라는 유교 국가 건설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면서 송나라의 『가례』를 기본으로 유교식 상례를 발전시킨다. 초기에는 성과가 없었지만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체백(體魄)이 묻힌 묘보다 신주를 모신 사당을 더 중시하는 유교식 의례가 정착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사당을 건립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벽감(壁龕)이라도 만들어 신주를 모시는 문화가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장사 후 반곡으로 신주를 집의 궤연에 모셨지만, 삼년상의 거상(居喪)의 예법을 지키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 관리나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시묘와 반혼으로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노수신(盧守愼, 15151590)과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논쟁은 실록에 실릴 정도로 유명했다. 노수신은 “반혼의 예를 행함으로써 상례의 기본이 무너져 풍속이 야박해지고 있다.”라고 하자 김우옹은 “반혼이 고례(古禮)인데, 여묘를 하려고 반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예가 아니라.”라고 반론한다. 류성룡이 둘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중재하고는 단지 부모상을 치르면서 근신하지 않는 자만 적발하여 처벌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여유길(呂裕吉, 15581619)이 상복을 입고 시묘하다가 죽었다는 기록은 시묘살이의 힘든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17세기 열악한 시묘 환경과 유교식 상례에 따른 반곡의 시행과 논쟁은 여막을 집에 차리는 가내여소(家內廬所)도 가능하게 만든다. 윤이후(尹爾厚, 16361699)는 빈소 옆방에 여소(廬所)를 차렸고 장사 후 반곡하여 신주를 궤연에 모시고 가내여소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윤증(尹拯, 1629~1714)이 교산(交山) 묘려로 가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올라가 곡하며 절했다는 기록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학봉 종택, 화재 이우섭 종택, 퇴계 종택 등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종가에서 삼년상을 치를 때 빈소가 있는 사랑채 한쪽을 겨릅대로 이엉을 엮어 여막을 만드는 것과 같다.
묘소 옆에 세웠던 재실이 시묘의 임시 여막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동계집(桐溪集)』 「용천정사편액기(龍泉精舍扁額記)」에 정온(鄭蘊, 1569~1641)이 시묘하던 곳이라고 한 것은 재사를 임시 여막으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또한 주자가 시묘한 ‘한천’ 역시 모친의 장사 뒤에 세운 정사로 여막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조선은 반혼의 비례(非禮)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시묘를 인정하고, 부제 역시 시묘가 끝나는 3년 후에 지내는 것도 용인하였다. 시묘는 예론에 없지만, 조선의 상황에 맞는 예법으로 발전하였기에 최근까지 가능했다.
시묘는 자식은 태어나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그 보답으로 삼년상은 치러야 한다는 『논어』의 「양화장(陽貨章」에 근거한다. 고려와 조선에서 유교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기에 효행의 표본으로서 시묘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예법에 관한 책의 규정이 아닌 의식적으로 장려된 관습이어서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었었다.
시묘는 예학자들도 신주를 모시는 예법이 잘 지켜지지 않자 차라리 시묘하라는 식으로 묵인한 관습이었다. 17세기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모시는 유교식 상례가 보편화되었지만, 문화 지체 현상으로 시묘는 계속되었다.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종가에서는 최근까지도 집에 여막을 설치하고 삼년상을 치르는 시묘를 행했는데, 이는 한국식 예론으로 발전한 문화 현상을 잘 보여 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