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막은 삼년상을 치를 때 상주가 무덤 옆에서 지어서 궤연(几筵)을 모시고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움막으로서, 여차(廬次), 여소(廬所), 여묘(廬墓), 의려(倚廬), 여(廬)라고도 한다. 유교적 상례(喪禮)에서는 본래 장례(葬禮)를 마친 뒤에는 신주(神主)를 조성하여 집으로 되돌아오는 반곡(反哭) 또는 반혼(返魂)을 통해서 신혼(神魂)을 가묘(家廟)에 모셔야 한다. 이 때문에 시묘살이는 체백(體魄)이 묻힌 무덤에서 삼년상을 치르기 때문에 반곡 또는 반혼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어서 올바르지 않은 예(禮)로써 많은 비판을 받았다. 상례 실천의 표준이 되는 『가례(家禮)』와 조선시대 국가 표준 전례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시묘살이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었으나, 효(孝)의 구현이라는 점에서는 지속적으로 실천되었고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시묘살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여막은 일반적으로 무덤 옆에 위치하지만, 집 안에 세울 때에는 본래 중문 바깥의 동쪽 담장 아래에 서까래와 같은 나무를 걸쳐서 만들었다. 『의례(儀禮)』에 따르면 “효자는 의려(倚廬)에 거처하는데 거적 위에서 흙덩이를 베고 자며 질(紩)과 대(帶)를 벗지 않고 지내며”, “ 우제(虞祭)를 지내고 나면 기둥으로 들보를 받치며 자리를 깔고 잔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상주는 여막에서 짚으로 만든 고석(藁席)을 깔고 고침(藁枕)을 베며 엄나무를 섞어 만든 엄신을 신고서 삼 년간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며 생활했다.
전통 시대의 여막은 움집 형태의 초가였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을 뿐 정확한 규모나 구조는 알 수가 없으며, 오늘날에도 드물게 여막을 볼 수 있지만 전통 시대의 형태와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효 이념으로 인해 사대부를 중심으로 여막이 폭넓게 유행했지만, 여막의 구조를 보여주는 자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의 <의려도(倚廬圖)>에 의하면, 집의 동쪽 벽의 서쪽에 붙어 있는 움막이 풀로 엮은 거적을 만들어 덮인 형상으로 여막이 묘사된다.
최근의 김용환과 김형래의 연구에 의하면, 묘소 옆에 짓는 여막의 구조가 선사시대의 움집과 비슷하며 지붕과 벽체를 이엉으로 두른 구조물로서 취식과 취침 및 난방이 가능한 시설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조선시대 안동의 이정회(李庭檜, 1542~1612)는 여막에서 모친상을 치르면서도 취식을 하면서 방문하는 손님을 맞았으며, 추운 겨울에는 수시로 숯과 나무를 마련하여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난방 시설 역시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많은 유학자들이 시묘살이 중에 공부도 하고 저술도 할 만큼 여막은 일정한 공간과 기본적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막과 시묘살이의 풍속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여막은 중국에서 공자(孔子)의 상을 당한 제자 자공(子貢)이 그 무덤에서 여막을 짓고 거처했던 사례부터 확인되지만, 한대 이후 나말여초 시기에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삼년상(三年喪)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여막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분명하게 확인된다. 예컨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예고(禮考)」의 사상례조(私喪禮條)에 의하면, 삼년상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이미 도입되었으며, 신라의 효자 손시양(孫時揚)의 정려비(旌閭碑) 비문에서는 여막에서 시묘살이하는 내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양상이 더욱 확장되어 장광부(張光富), 하윤원(河允源), 염신약(廉信若), 조간(趙簡), 정몽주(鄭夢周), 김광재(金光載) 등의 여묘살이가 확인되며, 성종(成宗) 때에는 국가적으로 『효경(孝經)』을 강조하면서 시묘살이가 부각되어 노비에 의한 대리 여묘가 실행되기도 했다. 조선에 와서 여묘살이의 풍습은 유교 문화가 만발한 조선에 와서 효행의 모범으로서 널리 칭송되는 주제가 되었다. 실제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의하면,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에게 복수한 최누백(崔累伯)이 여묘(廬墓)에서 삼년상을 치렀으며, 정몽주가 3년간 여막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기록 이후 수많은 기록들을 전할 정도로 조선에서는 여묘살이가 상당히 많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묘살이는 장지(葬地)에서 신주를 조성하여 사당으로 모셔 오는 『가례』의 반곡 절차와 충돌한다. 조선 전기까지는 시묘살이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례까지 생길 정도로 시묘살이가 훨씬 일반적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가묘를 중심으로 하는 상례와 제례(祭禮)의 의례문화를 정착시키고자 『가례』의 반곡과 충돌하는 문제가 많이 비판되었다. 이에 따라 사당의 신주를 중시하는 반곡 혹은 반혼의 유교적 예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묘소의 시체를 중시하는 비유교적 관습을 따를 것인가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벌어졌으며, 때로는 반곡과 시묘살이를 절충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실제로 최근 이루어진 윤이후(尹爾厚, 1636~1699)가의 여막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주자가례』에 따른 반곡(反哭) 이후 절차를 거행할 수 없다는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묘살이 대신 여막을 상가(喪家)로 옮겨서 가내여소(家內廬所)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반곡과 여묘살이의 절충이나 대안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풍습에 따라 일부 종가(宗家)에서는 삼년상동안 가내여소를 설치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 때 여막은 산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궤연을 설치한 빈소(殯所)가 있는 건물의 외벽을 이엉으로 덧씌우는 방식이었다. 이는 『가례』의 의절에 따라 반곡을 하여 집에 마련한 빈소에 제주(題主)한 신주를 모시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는 시신을 매장한 산소의 체백보다는 사당(祠堂)에 모신 신주인 신혼을 더 중요시하는 『가례』를 따르려고 한 고심의 결과이다. 따라서 기록에 등장하는 유명 인사들의 삼년 시묘살이는 대부분 이러한 가내여소의 형태였으며, 그 전통이 일부 종가에서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삼년상 풍습은 근대로 올수록 현실적으로 실천하기가 불가능하여 현재는 거의 사라졌다.
여막은 삼년상을 치를 때, 고인의 시체를 묻은 묘소 근처에서 살아계실 때처럼 돌아가신 부모님을 모시고자 지은 누추한 움막이다.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죄책감을 드러내는 지극한 효심의 의례적 표현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막의 시묘살이는 『주자가례』에 명기된 반곡 절차와 충돌하기 때문에 점차 여막의 시묘살이에서 벗어나서 반곡으로 이행하는 경향이 점진적으로 강화되었지만, 실제로는 시묘살이가 지속적으로 병행되었다. 또한 반곡과 여묘살이 사이에서 절충의 양상이 적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사후에 신혼이 깃드는 가묘의 신주를 중심으로 실천되었던 유교적 상례를 온전하게 실천하려면 반곡이 필수적이지만, 여막의 시묘살이는 체백이 묻히는 무덤을 중시했던 유교 전래 이전의 비유교적 전통의 연장선에서 유교적 효의 실천으로 일정하게 인정되었다. 따라서 여막의 시묘살이는 유교 전래 이전부터 시체와 무덤을 중시했던 전래의 비유교적 전통을 유교적 효의 관점과 결합시켜 유교적 상례와 병행하는 절충적인 의례 실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