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익(趙翼, 1579~1655). 호는 포저(浦渚), 존재(存齋), 자는 비경(飛卿)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중추부영사 등을 역임했다. 김육(金堉)과 함께 대동법 시행에 기여했으며, 학자로서 경학, 성리학, 예학은 물론 다양한 학문에 밝아 『대학곤득(大學困得)』과 『중용곤득(中庸困得)』을 비롯한 다양한 경학 저술들과 더불어 『가례향의(家禮鄕宜)』와 『주서요류(朱書要類)』 등을 저술했다. 문집으로는 『포저집(浦渚集)』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 현재까지 소개된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쓴 것으로 볼 수 없는 잘못된 글자들이 있어 자필본이 아니라는 의견을 번역자 권경열이 제시한 바 있어, 정밀한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가례』는 지나치게 간략하거나 미비한 점이 적지 않아서 다양한 상황에서 실제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검토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따라서 조선의 특수한 현실을 반영하고 개인마다 다른 사회적 상황과 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해서 실행 가능한 예법이 필요하였다. 조익은 1644년(인조 22)에 이런 문제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서민들도 실제로 적용 가능한 가례서로서 『가례향의』를 만들었다.
7권 2책. 필사본.
『가례향의』는 『가례』와는 달리, 통례(通例), 제례(祭禮), 상례(喪禮), 관례(冠禮), 혼례(婚禮) 순으로 편집 체계를 구성하여 실용성을 강화하였다. 특히 제례 편에서는 집안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고, 제례 용품과 제물 등의 실제 수급 상황에 따라 국속(國俗)과 시속(時俗)을 폭넓게 수용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중국의 예제(禮制)에 어긋나거나 『가례』에 없거나 맞지 않아도 필요할 경우에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가례의절』과 『상례비요』 등을 통해 보완하고 경제적 형편과 국가적 상황에 맞게 규정들을 정비함으로써 대중적이고 실용적인 방식을 추구하였다.
권경열의 연구에 의하면, 상례에서 보공(補空)에 쓰이는 의복의 가짓수나, 관례 때 건관(巾冠), 초립(草笠), 도포(道袍), 직령(直領), 단령(團領) 등을 조선의 속례(俗禮)에 따랐다. 또한 만두를 국수로 대체하거나, 소금과 초장을 청장(淸醬)으로 대신하거나, 차 진설(陳設)을 생략하는 등 조선의 현실에 맞는 실행을 적극 개진하였다. 조석전의 곡(哭)이나 담제(禫祭) 후에 술과 고기를 먹도록 허용하는 것에서는 중국보다 조선의 풍속이 아름답다고 주장하였으며, 명절의 묘제(墓祭) 역시 조선의 관례대로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비록 간행되지 못한 채 필사본으로만 남아서 구체적인 역사적 영향력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가례향의』는 조선 후기에 『가례』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사대부가의 가례가 점차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넓게 확대되는 흐름에 부응하여 서민들도 가례를 실천할 수 있도록 배려한 책으로서 의미가 있다. 권득기(權得己)의 『가례참의』, 이익(李瀷)의 『가례질서(家禮疾書)』, 정약용(丁若鏞)의 『사례가식(四禮家式)』 등과 같이 『가례』 실천의 실용성을 높이기 위해 조선의 현실을 따르는 속례를 폭넓게 수용하는 한편, 서민들이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가례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한 예학적 경향성을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