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빛깔의 가는 대를 결어 만든다. 조선 초기의 실록에는 왕이 신하의 평거(平居) 때의 쓰개로 내린 기록이 많고, ≪경국대전≫에도 선비의 초립은 50죽, 서인의 초립은 30죽으로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선비나 서인이 함께 사용하였으나 점차 관례한 소년이 흑립을 쓸 때까지의 관모로 사용하게 되어 ‘초립동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그 뒤 흑립이 일반화되면서 패랭이와 함께 상민의 쓰개가 되었는데 궁정의 세악수(細樂手), 사복(司僕)의 견마부(牽馬夫), 창우(倡優)는 연회석에서 초립을 착용하였고, 별감도 상복(常服)에는 황초립에 호수(虎鬚)를 달아 착용하였다.
초립은 패랭이와 비슷하나, 재료나 제법상 보다 발전된 패랭이에서 흑립으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것으로,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원통형의 모옥(帽屋)과 원형의 양태[笠檐]로 되어 있으며, 모정(帽頂)이 평평하다.
모정이 평평한 것은 제법상 흑립에 가까워진 모습이나 흑립은 양태가 아래로 우긋함에 비하여 초립은 위로 약간 올라간 점이 다르다. 초립은 강화도 교동의 특산물이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대구·경산·영천에서도 산출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