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과 발문이 없어 정확한 간행 경위는 알 수 없다. 『포저선생유서(浦渚先生遺書)』에 첨부된 윤증(尹拯)의 발문으로 미루어 볼 때 1692년(숙종 18)경 조익의 손자 조지항(趙持恒)·조지정(趙持正) 등에 의해 편집·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포저선생연보(浦渚先生年譜)』와 합본으로 영인·출판되었다.
35권 18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와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시 182수, 권2∼7에 소 75편, 권8∼13에 차(箚) 63편, 권14에 계사(啓辭) 24편, 권15에 계사 3편, 서(書) 13편, 권16·17에 서 27편, 권18∼25에 잡저 53편, 권26에 서(序) 24편, 권27에 기 7편, 발 14편, 권28에 잠명(箴銘) 12편, 교문(敎文) 1편, 교서 8편, 전(箋) 2편, 정문(呈文) 2편, 이자(移咨) 1편, 책문(策問) 5편, 권29에 축문 5편, 제문 30편, 권30에 제문 28편, 권31에 묘비명 4편, 권32에 묘갈명 9편, 묘지명 4편, 권33에 묘지명 10편, 음기(陰記) 2편, 묘표 3편, 권34·35에 행장 4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차·계사에는 조세 제도, 군사 제도, 과거 제도 등 시무(時務)에 관한 내용이 많다. 이 가운데 「논선혜청소(論宣惠廳疏)」·「논대동불의혁파소(論大同不宜革罷疏)」·「논대동계사(論大同啓辭)」·「대동청계사(大同廳啓辭)」 등은 당시 공납 제도의 폐단을 역설하고, 그 해결책으로 대동법(大同法) 실시를 건의한 것이다.
「논서변사의소(論西邊事宜疏)」·「논평산성수소(論平山城守疏)」·「진서변사의서(陳西邊事宜疏)」·「논심양송사차(論瀋陽送使箚)」·「인구언조진고변비개폐정차(因求言條陳固邊備改弊政箚)」 등은 당시 날로 강성해지는 후금(後金)의 군사 위협에 대비한 방어책을 논한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 중 척화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그것도 명분론적인 존명배청사상(尊明排淸思想)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국방 차원에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책을 주장하였다.
특히,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626년(인조 4)에 올린 「논서변사의소」에서는 국가의 당면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급선무로, 첫째 수해를 입은 서북 국경 지역 해변의 백성들을 구제하여 군사로 모집하고(救活海邊遇災之民), 둘째 요동(遼東)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군(明軍)을 지원하며(救活遼民), 셋째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여 변란에 대비하는 것(江邊待變之策)의 세 가지를 들고 조목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가 이루어진 때에 올린 「논평산성수소」·「논심양송사차」에서는 적과의 강화란 믿을 것이 못 되며, 국력을 길러 죽음으로써 싸우는 길만이 국가를 보전하는 방책임을 주장하고 있다.
차문(箚文) 중 「논변통과거강경차(論變通科擧講經箚)」에서는 과거에서 강경 제도를 폐지하고 임독(臨讀) 제도를 채택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강경 제도는 경서(經書)의 암송 정도를 과거의 당락 기준으로 삼아 응시자들로 하여금 경전의 대의와 정신에는 무지한 채 자구의 암송에만 매달리게 하는 폐단이 있으므로, 참다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경전을 펴놓고 읽어 가며 내용을 설명하게 하여 그 이해 정도에 따라 합격자를 선발하는 임독 제도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이성양현신문묘종사소(請李成兩賢臣文廟從祀疏)」에서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배향 문제에 대하여 서인(西人)의 영수(領袖)로서 확고한 태도로 두 사람의 문묘배향을 주장하고 있다. 서(書)는 분량은 많지 않으나 당대의 명사들인 윤근수(尹根壽)·이원익(李元翼)·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 등과 주고받은 서신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최명길에게 보낸 서신에는 주화론이 잘못임을 장문으로 논박하고 있다.
잡저는 주로 심법(心法)·경(敬) 등 수양론의 문제와 심(心)·성(性)·정(情) 등 인성론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경전에 대한 설(說)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심법십이장(心法十二章)」은 유교에서 전수되는 심법으로서 『서경』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부터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이르기까지 각 경전에서 뽑은 12편의 글을 모아 하나의 독립된 체계로 구성한 것이다. 「지경도설(持敬圖說)」은 경(敬)·성의정심(誠意正心) 등 수양론의 핵심적 문제를 도상(圖像)으로 제시하고 있다.
「도촌잡록(道村雜錄)」에서는 도(道)·예(禮)·의리(義理)·위학(爲學)·치도(治道) 등 유학 전반의 제 문제들에 대해 경전을 폭넓게 인용하면서 해명하고 있다. 이밖에 잡저에는 기사문(記事文)으로 병자호란 전후의 체험을 기록한 「병정기사(丙丁記事)」가 있다. 서(序)는 「학맹편서(學孟編序)」·「중용곤득서(中庸困得序)」 등 경전과 주자학 관계 서적에 붙인 서문이 많으며, 이는 당시 간행된 서적의 간행 경위를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인조·효종 무렵에 서인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조익의 사상과 활동을 알 수 있는 중심적인 자료이다. 이는 17세기 초의 국제 정세 및 조선의 대응 양상, 그리고 국내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당시 한문학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