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집 87권 39책, 속집 22권 9책, 외집 16권 8책, 합 125권 56책. 목판본. 서문·발문이 없어 간행경위와 시기를 알 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이 문집은 양적으로 방대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사상은 물론 당시의 정치·사회 등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정집은 권1∼4에 시 602수, 권5∼15에 소 121편, 권16에 계차(啓箚) 9편, 권17·18에 연중강계(筵中講啓) 18편, 권19에 의(議) 17편, 권20에 서계(書啓) 20편, 권21∼52에 서(書) 840편, 권53∼65는 잡저로 도(圖) 8편, 녹(錄) 1편, 설 17편, 의(議) 3편, 기 10편, 변(辨) 7편, 석의(釋義) 4편, 고증(考證) 5편, 범례 3편, 규약 8편, 권66에 사론(史論) 2편, 서(序) 15편, 권67에 기 7편, 권68·69에 제발(題跋) 63편, 권70에 명 3편, 잠 2편, 혼서(昏書) 7편, 상량문 2편, 축문 31편, 권71에 제문 39편, 권72에 비 1편, 신도비·묘비·비음기 9편, 권73·74에 묘갈명 35편, 권75에 묘표 13편, 권76∼79에 묘지명 41편, 권80∼82에 행장 13편, 권83에 전(傳) 4편, 권84∼86에 연보 3편, 권87에 공이(公移)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속집은 권1에 시 83수, 권2∼4에 차서(箚書) 1편, 소 24편, 차(箚) 27편, 권5·6에 연중강계 12편, 권7에 의 2편, 서계장계(書啓狀啓) 17편, 권8∼12에 서(書) 246편, 권13∼18에 답문(答問) 62편, 권19·20에 잡저 10편, 제발 7편, 잠 1편, 축문 4편, 권21·22에 신도비명 3편, 묘갈명 7편, 묘표 10편, 묘표후기 1편, 묘지명 4편, 행장 1편, 외집은 권1에 시 85수, 소 3편, 권2∼6에 서(書) 202편, 권7∼9에 답문 85편, 권10·11에 잡저 15편, 권12에 사론(史論) 1편, 서(序) 5편, 기 2편, 제발 15편, 축문 4편, 제문 8편, 권13에 묘갈명 12편, 묘표 11편, 권14에 묘지명 18편, 권15·16에 행장 9편, 전(傳)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소문은 시사(時事)에 대해 논한 것과 사직소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 「진시무만언소(陳時務萬言疏)」는 왕의 구언(求言)에 따라 시무에 대한 건의를 올린 것이다. 「연중강계」는 1682년(숙종 8) 9월에서 1688년 7월까지 경연에서 강론한 경전의 내용과 시사·정치에 대해 왕과 조신(朝臣)의 문답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의는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연제(練祭: 부친보다 모친이 먼저 돌아갔을 때 만 1년 만에 지내는 제사를 11달만에 지내는 제사)를 행하는 것의 옳고 그름과 공정대왕(恭靖大王)의 묘호(廟號), 태조대왕의 추가존호 등 주로 왕실에 관한 예의절차와 시행의 가부를 의논한 것이다.
서(書)와 답문은 학문과 시사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며, 저자의 학문과 사상이 총집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례(喪禮)·제례(祭禮)·국휼례(國恤禮)·『춘추』·『맹자』·성리설·향음주례(鄕飮酒禮)·『근사록』·『심경』·『중용』·『논어』·『가례』·『혼례』 등의 내용에 대해 광범위하게 문답한 것으로, 특히 예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나타내고 있다.
잡저의 내용도 성리학과 예설에 관한 내용이 많다. 그 중에서 「성학지행노맥지도(聖學知行路脈之圖)」·「성현출처지도(聖賢出處之圖)」·「도통전후상승지도(道統前後相承之圖)」에서는 학자에게 공부하는 순서와 방법, 성현의 출처와 행도, 예로부터 성현들이 계승해온 도통의 연원 등을 그림으로 표시하고, 그 방법과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였다.
「경전요목(經典要目)」에서는 『소학』·사서(四書)·『근사록』·삼경(三經) 등에 대해 중요한 목록을 열거하여 해석했으며, 특히 「퇴계사서질의의(退溪四書質疑義)」에는 그의 사상적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저자의 방대한 저술은 이 문집 이외에도 상당한 양이 있어, 그 사상의 폭과 깊이를 엿볼 수가 없다.
이 문집에 나타난 그의 사상적인 경향은 우선 내용에서 성리학과 예학(禮學)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그의 성리학적인 경향은 이이(李珥) 계통의 기호학파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송시열(宋時烈) 계열의 학자가 이이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한 것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운 입장을 가진다. 이것은 「사단이발칠정기발설(四端理發七情氣發說)」과 「퇴계사서질의의」에서 이이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이황(李滉)의 호발설(互發說)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예학에 있어서도 당대에 꼽히는 학자였다. 이이 이후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에 이어 송시열과 함께 예론의 대가로서 광범위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특히, 당시 복제 문제와 연관된 당쟁의 영향 아래 상례에 대해 깊은 이론을 갖추고 있다.
그의 사상을 논할 때 간과하기 쉬운 점은 그가 김상헌(金尙憲)으로부터 의리학(義理學)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제시하는 『춘추』에 대해 보편(補編)을 찬술한 것이나, 한국 유학의 도통(道統)을 은연중에 제시하고 있는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의 저술, 성리학적 전통의 확립을 위한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 등과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 등의 저술은 모두 이와 같은 의리학적 전통의 처지에서 이룩된 것이다.
이밖에 저자는 현실에서는 당쟁에 휘말렸고, 그 속에서 여러 번 부침을 경험했으나, 학문과 현실에서 이런 당쟁의 격화를 줄여보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황의 학설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나, 『퇴계어록』을 저술한 것은 물론이며, 황극탕평책(皇極蕩平策)이라는 중도(中道)에 의한 탕평책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이 사실을 증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