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휼청은 조선시대에 곡물가를 조절하고 재난을 당한 기민(飢民)이나 재민(災民)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조선 초기에 재해 발생 시 임시로 설치되었으나 1525년(중종 20)에 광흥창 · 풍저창의 곡물과 여타 관고(官庫)의 잉여 곡물을 모아 진휼청을 설치한 뒤 상평청과 합쳐 흉년에는 진대(賑貸)와 기민구제를 담당하고, 평상시에는 물가 조절 업무를 맡게 하였다. 선혜청(宣惠廳)이 설치되면서 선혜청의 관리 아래 두었다. 17세기 후반에 상설 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으나,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곡물 가격을 조절하고, 흉년에 굶주린 기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기민을 구제하고 곡물 가격을 조절하는 업무를 호조가 담당하였다. 1405년(태종 5)에 고려 말의 의창(義倉)을 관장하는 삼사가 호조로 흡수됨에 따라 호조의 판적사(版籍司)에서 그 업무를 승계하였다.
그런데 의창의 업무가 날로 번거로워져 판적사에서 관장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 말엽에 상평창(常平倉: 후의 상평청)을 두어 곡물 가격 조절 업무를 맡게 하고, 흉년에 기민 구제를 담당할 기관으로 구황청(救荒廳)을 임시 설치하였다. 그러나 구황청은 상평창과는 달리 상설 운영되지 않고 흉년에만 일시적으로 개설, 운영되었기 때문에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업무는 여전히 호조에 속해 있었다.
재해를 당하여 기민들을 위한 진휼책이 잘 운영되지 않자 진휼을 위한 새로운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1511년(중종 6)에 기존의 사신(使臣)을 파견하는 대신 재해 행정을 전담하는 임시 기구인 진휼청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에는 진휼청에서 동 · 서 진제장(東西賑濟場)을 설치하였다.
1517년(중종 12)에 중앙에는 진휼청을 두고, 외방에는 진휼사(賑恤使)를 보냈지만, 구휼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유랑하는 백성이 잇따르고 굶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 1524년(중종 19)에 심한 흉년이 들자 호조판서를 진휼사로 삼아 진휼 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1525년(중종 20)에 광흥창(廣興倉) · 풍저창(豊儲倉)의 곡물과 여타 관고(官庫)의 잉여 곡물을 모아 진휼청을 설치하였다.
그 뒤 상평청과 합쳐 흉년에는 진대(賑貸)와 기민구제를 담당하고, 평상시에는 물가 조절 업무를 맡게 하였다. 1541년(중종 36)에는 승정원에 진휼청이 수행할 절목(節目)을 내렸다. 1547년(명종 2)에는 진휼청의 건의로 동 · 서 진제장을 열었고, 이듬해에 진휼청에서 사족을 구제한 것이 392호이며, 동진제장의 기민 544명, 서진제장의 기민 413명을 구제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상평청과 진휼청으로 분리되었으나 1608년(광해군 즉위)에 대동법을 관장하는 기구인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면서, 그 업무를 다시 상평청과 합쳐 선혜청의 관리 아래 두었다. 임시 관서로 출발하여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였던 진휼청은 17세기 후반에는 상설 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도제조 및 제조 이하 실무자들로 구성된 조직을 갖추었다. 진휼청은 담당 낭청(郎廳)의 주관 하에 계사(計士) · 서리 · 고직(庫直) 등의 직원들이 선혜청 당상의 지휘를 받으며 구휼 업무를 수행하였다.
정약용은 『 경세유표』에서 "진휼청이라는 명칭은 명종 9년(1554)에 보이고, 인조 4년(1626)에 와서는 비국(備局: 비변사)에서 관할하던 구황청을 선혜청에 예속시켰다. 영조 46년(1770)에 선혜청 제조(提調) 정홍순(鄭弘淳)이 상평창 곡식과 진휼청 곡식은 곡식으로 통해 쓰면서 문부는 두 갈래로 분간하여 불편하니 하나로 합쳐서 명칭을 상진곡(常賑穀)이라 하기를 청하였다"고 하였다. 혹은 "현종 1년(1660)에 진휼청을 창설해서 곤궁한 백성을 진대하면서 비국에서 관리하였는데 영조 46년에 상평곡과 합병하였다"고도 하였다.
『 동국여지비고』에는 “진휼청: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다. 인조 4년에 비변사에게 구황청(救荒廳)을 관할하게 하면서 상평청에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비국에 붙였다. 현종 2년에 새로 설치하고, 숙종 12년에 본청(本廳: 선혜청)으로 이속하였다”라고 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