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5년(영조 2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설서 · 이조정랑 · 지평 · 교리 · 이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호조판서로 10년 간 재직하면서 재정 문제에 특히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1762년 호조판서로서 예조판서를 겸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상(喪)에 장의(葬儀)를 주관하면서, 장헌세자의 의복과 금침에서부터 악모대리(幄帽帶履) 등 미세한 것까지 한쪽씩 떼내어 그때의 문부(文簿)와 함께 봉하여 수자(守者)를 단속하고 이를 보관하였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한 다음 해, 앞서 세자의 장례 때 상례의 풍부 여부를 알고자 당시 예조판서였던 그를 대령하게 했는데, 그가 곧 서리를 시켜 당시 간직해두었던 것을 내어다 보이자,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 매우 가상히 여겨 곧 우의정에 제수했다.
정승이 된 뒤에도 미세한 일에까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였다. 어느 때인가 자기집을 수리할 때 공인(工人)과 더불어 일삯으로 서로 다툰 일이 있었다. 이를 본 그의 아들이 “어른의 신분으로 천한 공인과 노임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까?”하니, 그는 “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儀表)인데, 내가 삯을 과히 주면 온 나라의 예가 되어 빈한한 백성들이 많은 곤란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또, 한때 그에게 파전(破錢) 한푼이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땜질하여 붙이는 데 두푼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두푼을 들여 한푼을 얻으면 오히려 한푼이 손해가 나는데 어째서 공은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나 개인은 한푼을 잃었어도 나라에는 한푼이 이익이 되니 어찌 이익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의 도량에 탄복했다 한다.
시호가 정민(靖敏)으로 내려졌다가, 뒤에 충헌(忠憲)으로 개시(改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