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송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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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학자·의병·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서산집』, 『보인계첩』 등을 저술한 학자.
김흥락 (金興洛)
조선 후기에, 학자·의병·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서산집』, 『보인계첩』 등을 저술한 학자.
조선시대 궁중에서 봉직하던 빈(嬪)·귀인(貴人)·소의(昭儀)·숙의(淑儀) 등 여관(女官)의 총칭.
내명부 (內命婦)
조선시대 궁중에서 봉직하던 빈(嬪)·귀인(貴人)·소의(昭儀)·숙의(淑儀) 등 여관(女官)의 총칭.
조선시대 내명부의 정1품의 위호(位號).
빈 (嬪)
조선시대 내명부의 정1품의 위호(位號).
조선시대 내명부(內命婦)의 궁관계층(宮官階層)에 속하는 정5품의 여관(女官).
상궁 (尙宮)
조선시대 내명부(內命婦)의 궁관계층(宮官階層)에 속하는 정5품의 여관(女官).
성혼은 조선시대 『우계집』, 『주문지결』, 『위학지방』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 1598년(선조 31)에 사망했다. 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고 이조판서로 봉사했으나 국정운영에 관한 봉사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이의 권유로 관직에 나아갔고 임진왜란 중에도 조정에 봉사했으나 대체로 벼슬을 극구 사양했다.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다시 복권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성혼 (成渾)
성혼은 조선시대 『우계집』, 『주문지결』, 『위학지방』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 1598년(선조 31)에 사망했다. 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고 이조판서로 봉사했으나 국정운영에 관한 봉사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이의 권유로 관직에 나아갔고 임진왜란 중에도 조정에 봉사했으나 대체로 벼슬을 극구 사양했다.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다시 복권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영조는 조선후기 제2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724~1776년으로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적극 구사하여 국정 안정을 도모했다. 나아가 균역법실시 등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안정을 통해 민심을 추스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후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호는 구리시에 있는 원릉이다.
영조 (英祖)
영조는 조선후기 제2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724~1776년으로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적극 구사하여 국정 안정을 도모했다. 나아가 균역법실시 등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안정을 통해 민심을 추스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후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호는 구리시에 있는 원릉이다.
일제강점기 때, 협동학교 교장,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안동지회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구국운동 및 노동운동을 전개한 교육자·독립운동가.
유인식 (柳寅植)
일제강점기 때, 협동학교 교장,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안동지회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구국운동 및 노동운동을 전개한 교육자·독립운동가.
조선 후기에, 『이학종요』, 『사례집요』, 『묘충록』 등을 저술한 학자.
이진상 (李震相)
조선 후기에, 『이학종요』, 『사례집요』, 『묘충록』 등을 저술한 학자.
이현일은 조선후기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학자이다. 1627년(인조 5)에 태어나 1704년(숙종 30)에 사망했다. 1646년 초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영릉참봉, 공조좌랑, 사헌부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89년 산림에게만 제수되는 사업과 좨주에 임명되었다. 갑술환국 이후 함경도 홍원과 종성, 호남의 광양 등지로 유배되었다. 1699년 해배되어 안동으로 귀향한 후 강학에 전념하였다.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거두로 평가되고 있다.
이현일 (李玄逸)
이현일은 조선후기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학자이다. 1627년(인조 5)에 태어나 1704년(숙종 30)에 사망했다. 1646년 초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영릉참봉, 공조좌랑, 사헌부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89년 산림에게만 제수되는 사업과 좨주에 임명되었다. 갑술환국 이후 함경도 홍원과 종성, 호남의 광양 등지로 유배되었다. 1699년 해배되어 안동으로 귀향한 후 강학에 전념하였다.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거두로 평가되고 있다.
장현광은 조선 시대 『여헌집』, 『성리설』, 『역학도설』 등을 저술하였으며,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한 학자이다. 1554년(명종 9)에 출생하여 1637년(인조 15)에 사망하였다. 자는 덕회, 호는 여헌, 시호는 문강이다. 장현광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장현광은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장현광의 철학은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에서는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장현광 (張顯光)
장현광은 조선 시대 『여헌집』, 『성리설』, 『역학도설』 등을 저술하였으며,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한 학자이다. 1554년(명종 9)에 출생하여 1637년(인조 15)에 사망하였다. 자는 덕회, 호는 여헌, 시호는 문강이다. 장현광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장현광은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장현광의 철학은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에서는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조선후기 훈련대장,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한 무신.
정여직 (鄭汝稷)
조선후기 훈련대장,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한 무신.
조선전기 예문관검열, 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정여창 (鄭汝昌)
조선전기 예문관검열, 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1590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과 함께 역모를 꾸민 주동자로 무고되어 옥사한 학자.
최영경 (崔永慶)
1590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과 함께 역모를 꾸민 주동자로 무고되어 옥사한 학자.
허목은 조선후기 성균관제조,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95년(선조 28)에 태어나 1682년(숙종 8)에 사망했다.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과 글씨에 전념해 독특한 전서를 완성했다. 예론에 뛰어나 두 차례 예송 논쟁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대상으로 남인의 주장을 대변했다. 현종 대에는 서인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좌천되었으나 숙종 대에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어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학문적으로는 주자학 일존주의에서 벗어나 원시유학을 중시했다.
허목 (許穆)
허목은 조선후기 성균관제조,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95년(선조 28)에 태어나 1682년(숙종 8)에 사망했다.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과 글씨에 전념해 독특한 전서를 완성했다. 예론에 뛰어나 두 차례 예송 논쟁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대상으로 남인의 주장을 대변했다. 현종 대에는 서인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좌천되었으나 숙종 대에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어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학문적으로는 주자학 일존주의에서 벗어나 원시유학을 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