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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며, 1418년 6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이 공고해졌다. 훈민정음 창제는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여주시에 있다.
세종 (世宗)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며, 1418년 6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이 공고해졌다. 훈민정음 창제는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여주시에 있다.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유관순 (柳寬順)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띠는 사람이 태어난 해의 지지를 동물 이름으로 상징하여 이르는 말을 가리키는 민속용어다. 쥐띠·소띠·범띠·토끼띠·용띠·뱀띠·말띠·양띠·잔나비띠·닭띠·개띠·돼지띠 등 12띠가 있다. ‘각 사람의 심장에 숨어 있는 동물’이라고도 하는데 토템사회에서 인간이 동물을 숭배하던 유풍에서 발생했다. 지지는 천간과 합쳐져 60갑자를 이루는데 여기에 우주의 순환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보아 띠에 사람의 운명을 결합하기도 했고, 사람의 성격을 배당하기도 했다. 특히 불교의 영향으로 12지신상에 나오는 신령스런 수호신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띠
띠는 사람이 태어난 해의 지지를 동물 이름으로 상징하여 이르는 말을 가리키는 민속용어다. 쥐띠·소띠·범띠·토끼띠·용띠·뱀띠·말띠·양띠·잔나비띠·닭띠·개띠·돼지띠 등 12띠가 있다. ‘각 사람의 심장에 숨어 있는 동물’이라고도 하는데 토템사회에서 인간이 동물을 숭배하던 유풍에서 발생했다. 지지는 천간과 합쳐져 60갑자를 이루는데 여기에 우주의 순환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보아 띠에 사람의 운명을 결합하기도 했고, 사람의 성격을 배당하기도 했다. 특히 불교의 영향으로 12지신상에 나오는 신령스런 수호신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조선시대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545년(명종 즉위)에 태어나 1598년(선조 31)에 사망했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자 왜의 침략에 대비해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임진왜란이 나자 옥포·노량·당포·당항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한산도와 부산포에서도 적들을 격파하고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조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잡혀가 문초를 당했다. 정유재란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다시 기용되어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적선을 추격하다 유탄을 맞고 사망했다.
이순신 (李舜臣)
이순신은 조선시대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545년(명종 즉위)에 태어나 1598년(선조 31)에 사망했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자 왜의 침략에 대비해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임진왜란이 나자 옥포·노량·당포·당항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한산도와 부산포에서도 적들을 격파하고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조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잡혀가 문초를 당했다. 정유재란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다시 기용되어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적선을 추격하다 유탄을 맞고 사망했다.
정약용은 조선후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62년(영조 38)에 태어나 1836년(헌종 2)에 사망했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개혁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정조 재위기에는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장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중에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정약용 (丁若鏞)
정약용은 조선후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62년(영조 38)에 태어나 1836년(헌종 2)에 사망했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개혁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정조 재위기에는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장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중에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안중근은 일제강점기 이토저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9년(고종 16)에 태어나 1910년에 사망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했다가 국내실력양성이 중요하다는 선교사의 충고로 귀국했다. 학교를 설립하고 연해주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며 각종 모임을 만들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1909년 3월에 동지 12명이 모여 이토와 이완용 제거를 단지의 피로써 맹세하고 9월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 현장에서 체포됐다. 개인이 아닌 대한의용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라 주장하다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안중근 (安重根)
안중근은 일제강점기 이토저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9년(고종 16)에 태어나 1910년에 사망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했다가 국내실력양성이 중요하다는 선교사의 충고로 귀국했다. 학교를 설립하고 연해주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며 각종 모임을 만들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1909년 3월에 동지 12명이 모여 이토와 이완용 제거를 단지의 피로써 맹세하고 9월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 현장에서 체포됐다. 개인이 아닌 대한의용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라 주장하다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내고 각성과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민족의 운명을 새로 개척해나간 계기가 된 전쟁이다. 명의 원조도 있었지만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거족적인 저항으로,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과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은 불리했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킨 결정적인 힘이었다.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명과 청이 교체되면서 병자호란이라는 시련을 예고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내고 각성과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민족의 운명을 새로 개척해나간 계기가 된 전쟁이다. 명의 원조도 있었지만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거족적인 저항으로,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과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은 불리했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킨 결정적인 힘이었다.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명과 청이 교체되면서 병자호란이라는 시련을 예고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의 시대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말살까지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악랄한 것이었다. 일제는 역사왜곡을 통한 정신문화의 개조, 한국어 사용 억제, 민족문화유산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이에 맞선 항일독립투쟁은 전세계 약소민족의 모범이 될 정도로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어 광복을 이루어냈다. 일제강점이 우리 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어서 남북분단까지 초래했다.
일제강점기 (日帝强占期)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의 시대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말살까지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악랄한 것이었다. 일제는 역사왜곡을 통한 정신문화의 개조, 한국어 사용 억제, 민족문화유산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이에 맞선 항일독립투쟁은 전세계 약소민족의 모범이 될 정도로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어 광복을 이루어냈다. 일제강점이 우리 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어서 남북분단까지 초래했다.
계엄령은 1949년 11월 24일에 제정된, 전시 ·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선포하는 명령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계엄령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정하였다.
계엄령 (戒嚴令)
계엄령은 1949년 11월 24일에 제정된, 전시 ·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선포하는 명령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계엄령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정하였다.
소음인은 사상의학상 분류한 네 체질 중 신(腎)이 크고 비(脾)가 작은 체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해 한의학의 병리와 약리는 모두 소음인 체질에서 발전해 왔다. 본래 비장과 위장이 허약하고 신장이 충실하여 몸의 형태가 위아래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생김새는 대체로 작은 편이다. 비·위장이 약해 소화력이 떨어져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위장장애를 일으키는 등 소음인 특유의 신체적 특징이 있다. 따라서 체질에 맞는 식생활이 중요하다. 성격상으로도 특유의 기질이 있어 사회생활에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소음인 (小陰人)
소음인은 사상의학상 분류한 네 체질 중 신(腎)이 크고 비(脾)가 작은 체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해 한의학의 병리와 약리는 모두 소음인 체질에서 발전해 왔다. 본래 비장과 위장이 허약하고 신장이 충실하여 몸의 형태가 위아래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생김새는 대체로 작은 편이다. 비·위장이 약해 소화력이 떨어져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위장장애를 일으키는 등 소음인 특유의 신체적 특징이 있다. 따라서 체질에 맞는 식생활이 중요하다. 성격상으로도 특유의 기질이 있어 사회생활에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김구는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고종 13)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 항일 투쟁 중에 두 차례 투옥, 동학 입교, 출가, 기독교 입교 등 분주하게 살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했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다 환국한 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전심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김구 (金九)
김구는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고종 13)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 항일 투쟁 중에 두 차례 투옥, 동학 입교, 출가, 기독교 입교 등 분주하게 살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했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다 환국한 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전심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에는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국전쟁 (韓國戰爭)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에는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
5·18광주민주화운동 (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
정조는 조선후기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776~1800년이며,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아들이다.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부하며 당파적 분쟁을 뛰어넘어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냈다. 규장각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해갔으며,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친위군인 장용영 설치,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한 왕권으로 왕도정치의 모범을 보이며 조선후기 문화부흥을 이루었다.
정조 (正祖)
정조는 조선후기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776~1800년이며,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아들이다.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부하며 당파적 분쟁을 뛰어넘어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냈다. 규장각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해갔으며,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친위군인 장용영 설치,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한 왕권으로 왕도정치의 모범을 보이며 조선후기 문화부흥을 이루었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이다. 1950년대 말에 반공 이념과 경찰력이란 물리력에 의존하던 이승만식 독재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시지역과 지식인·학생 등 식자층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높아져 갔다. 부정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연장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3·15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자 학생들을 선두로 한 민심은 폭발했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도 이를 막지 못했다. 이승만의 하야와 망명으로 독재는 종식됐으나 지도부 부재 등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군사 쿠데타의 길을 터주었다.
4·19혁명 (四一九革命)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이다. 1950년대 말에 반공 이념과 경찰력이란 물리력에 의존하던 이승만식 독재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시지역과 지식인·학생 등 식자층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높아져 갔다. 부정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연장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3·15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자 학생들을 선두로 한 민심은 폭발했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도 이를 막지 못했다. 이승만의 하야와 망명으로 독재는 종식됐으나 지도부 부재 등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군사 쿠데타의 길을 터주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방법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다.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하고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3·1운동 (三一運動)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방법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다.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하고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뱀띠는 12띠 중 여섯 번째의 띠이다. 사년생을 가리킨다. 시는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까지, 방위는 남남동, 오행은 화에 배당되고 대응하는 서양 별자리는 황소좌이다. 충실의 기를 타고나 사람됨이 비범하며 무슨 일이든 자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며 의지력이 있다. 품위 있고 용의주도한 편이며, 어느 종교에 빠지게 되면 어떤 박해나 어려움도 굴하지 않고 한길로 매진하는 정력과 패기를 지닌다. 세심하면서도 의심이 많은 신경질적인 기질이 있어 방종을 경계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뱀띠와 화합하는 띠는 닭띠·소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돼지띠이다.
뱀띠
뱀띠는 12띠 중 여섯 번째의 띠이다. 사년생을 가리킨다. 시는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까지, 방위는 남남동, 오행은 화에 배당되고 대응하는 서양 별자리는 황소좌이다. 충실의 기를 타고나 사람됨이 비범하며 무슨 일이든 자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며 의지력이 있다. 품위 있고 용의주도한 편이며, 어느 종교에 빠지게 되면 어떤 박해나 어려움도 굴하지 않고 한길로 매진하는 정력과 패기를 지닌다. 세심하면서도 의심이 많은 신경질적인 기질이 있어 방종을 경계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뱀띠와 화합하는 띠는 닭띠·소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돼지띠이다.
원경왕후는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왕비이다. 1365년(공민왕 14)에 태어나 1420년(세종 2)에 사망했다.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 이방원을 도왔다.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라는 칭호를 얻었다.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후궁을 두는 문제로 태종과 불화가 심했고 친정 동생들로 인해 폐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려 한 태종의 정책에 동생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자진했고 나머지 두 형제마저 불충 죄로 잃는 불행을 겪었다.
원경왕후 (元敬王后)
원경왕후는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왕비이다. 1365년(공민왕 14)에 태어나 1420년(세종 2)에 사망했다.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 이방원을 도왔다.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라는 칭호를 얻었다.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후궁을 두는 문제로 태종과 불화가 심했고 친정 동생들로 인해 폐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려 한 태종의 정책에 동생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자진했고 나머지 두 형제마저 불충 죄로 잃는 불행을 겪었다.
윤봉길은 일제강점기 훙커우공원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에 태어나 1932년에 사망했다. 3.1운동 후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 농민계몽·부흥 운동에 전력했다. 1930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으며, 이듬해 상해로 옮긴 후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에 입단, 김구의 주관 하에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 후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윤봉길 (尹奉吉)
윤봉길은 일제강점기 훙커우공원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에 태어나 1932년에 사망했다. 3.1운동 후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 농민계몽·부흥 운동에 전력했다. 1930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으며, 이듬해 상해로 옮긴 후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에 입단, 김구의 주관 하에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 후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유학과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취임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발췌개헌안’,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켜 재선·3선에 성공했다. 4선 도전에서도 무투표로 당선됐으나 4·19혁명이 발발하자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 (李承晩)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유학과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취임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발췌개헌안’,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켜 재선·3선에 성공했다. 4선 도전에서도 무투표로 당선됐으나 4·19혁명이 발발하자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