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집은 조선 후기, 환곡을 동전으로 바꿀 때 지시한 액수보다 높은 가격으로 바꾸거나, 지정한 곡식의 양보다 임의로 더 늘려 동전으로 만든 것이다. 환곡의 모곡(耗穀)을 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운반할 때 모곡을 돈으로 바꾸어 운반하기도 하였고, 환곡의 수량을 줄이기 위해서 곡식을 동전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방관과 아전들은 상부에서 지시한 양보다 더 많은 곡식을 동전으로 바꾸어 이익을 취하였다. 또한 곡식을 바꿀 때에는 조정에서 책정한 가격이 아니라 시가로 교환하여 이익을 취하였다.
환곡의 모곡(耗穀)을 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서울이나 감영으로 올려 보낼 때 운반상의 편의를 위하여 모곡을 돈으로 바꾸어 운반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는 한 지역의 환곡 비축량이 인구에 비해 많은 경우, 비축량을 줄이기 위해서 곡식을 돈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환곡을 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지방관과 아전들은 조정 혹은 감사가 지시한 액수보다 더 많은 곡식을 임의로 돈으로 바꾸고 있었다.
곡식을 동전으로 바꿀 때에는 조정에서 책정한 가격인 상정가(詳定價)로 바꾸도록 하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고 시가(時價)로 바꾸어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삼남지역에서 환곡의 상정가는 쌀 1섬은 3냥, 좁쌀 1섬은 3냥, 콩 1섬은 1냥 5전 등이었지만, 시가에 따라 이보다 높은 가격으로 바꾸는 ‘고가집전(高價執錢)’이 시행되어 폐단이 심해졌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가집을 시행하는 주체에 따라서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수령이 가집하는 것을 관가(官加), 지방관이 가집할 때를 이용하여 아전들이 추가로 가집하는 것을 이가(吏加)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사료에서 가집은 가작(加作)이라는 용어로 나타나고 있다. 가작은 가수작전(加數作錢)의 줄임말인데, 액수를 더하여 돈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환곡을 동전으로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지방관이나 아전들은 지시한 액수 이외에 임의로 추가하여 돈으로 만들어 이익을 취하였다. 이때 곡식 가격이 비싼 고을에서는 곡식을 돈으로 만들고 곡식이 싼 고을에서 곡식을 사서 이익을 취하였다. 이런 방식은 곡식을 옮겨서 본전을 채운다고 하여 ‘ 이무입본(移貿立本)’이라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환곡이 1,000만 석 정도로 증대한 시기에는 환곡의 지역적 불균형이 문제가 되었다. 산골 지역에서는 환곡이 많이 비축되었고 연안 지역에서는 환곡이 적어서 문제가 되었다. 19세기 들어서도 지역 간 비축량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고 환곡을 동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이무입본이나 가작 · 가집 등의 부정행위가 구조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