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은 조선 후기에 실제로는 분급하지 않은 환곡의 절반을 농민에게 물게 하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추수 뒤에 환곡을 회수할 때 10%의 모곡(耗穀)을 징수하였고, 각종 명목을 붙여서 추가로 징수하였다. 농민들은 부실한 곡식을 받고 가을에 원곡과 원곡의 절반이 넘는 액수를 납부하기보다는, 환곡을 받지도 않고 받기로 한 환곡 액수의 절반만을 납부하는 편을 택하였다. 반백은 환곡의 모곡을 국가 재정에 사용하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농민들에게까지 환곡을 나누어 주고 모곡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폐단이었다.
환곡 1섬(1섬=180ℓ)을 나누어 준다고 할 때, 실제로는 전혀 분급하지 않고 반 섬 곡식을 아전이 착복하고 반 섬 곡식은 그대로 창고에 묵혀 둔 뒤, 가을에 농민들에게 자신들이 착복한 반 섬 곡식을 납부하게 하던 것을 말한다. 정약용이 지은 『 목민심서』에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는 방법 12가지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반백의 뜻은 ‘절반을 억지로 걷는다’는 ‘절반백징(折半白徵)’에서 나온 듯하다.
조선의 환곡 제도는 봄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가을에 회수할 때에 원곡의 10%를 모곡(耗穀)의 명목으로 징수하였다. 환곡 제도에서 모곡으로 10%를 징수하는 일은 환곡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취모보용(取耗補用)’이 시행되면서 모곡의 일부가 국가 재정으로 전용되었다. 모곡의 일부가 국가 재정에 전용되었다는 의미는 지방관에게는 모곡 수입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지방관은 모곡 수입이 줄어들자 환곡을 징수할 때에 부가 명목을 대어 추가로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곡식의 품질을 검사하고[간색(看色)] 곡식을 계량할 때에 축나는 것[낙정(落庭)]을 명목으로 ‘색락(色落)’을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18세기 후반에 환곡을 징수할 때에는 원곡과 함께 모곡 10%와 색락을 징수하였다.
색락의 징수는 법전에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지나치게 많이 걷지 않는 이상 용인되었고, 지방 재원으로 활용하였다.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10% 정도의 색락은 고을의 관례라면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색락을 많이 징수하면 처벌의 대상이 되었으며, 정약용은 환곡을 거둘 때 10%가 아니라 50% 이상을 걷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또한 아전들은 환곡하는 곡식에 겨와 쭉정이를 섞어서 1섬의 곡식을 2~3섬으로 만들어서 나누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전들은 환곡을 받아야 하는 농민들에게 분석(分石)한 곡식을 받아야 하는 문제, 가을에 환곡을 갚을 때에 모곡과 색락 등을 납부해야 하는 문제, 환곡을 받아가고 갚으러 올 때 드는 시간과 운반 비용 문제 등을 언급하며 이를 아끼는 방책으로 반백을 제시하였다. 즉, 부실한 원곡과 원곡의 절반이 넘는 모곡과 색락, 그리고 오가는 운반 비용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환곡을 받지 않고, 받기로 한 액수의 절반만을 가을에 납부하라는 것이었다.
아전들은 봄에 농민들에게 분급하기로 한 액수의 절반을 정실한 곡식으로 가져가서 착복하고 나머지 절반은 창고에 묵혀 두었다. 그리고 가을에 농민들에게 자신들이 착복한 원곡의 절반을 걷어 반환해야 할 곡식의 섬수를 채워 넣는다. 이때에도 정실한 곡식에 겨와 쭉정이를 섞어서 납부하며, 아전들은 색락을 내지 않았다.
반백은 환곡의 모곡을 국가 재정에 사용하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농민들에게까지 환곡을 나누어 주고 모곡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폐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