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본은 조선 후기에 지방관이 정부의 승인을 받고 창고에 있던 곡식을 요령껏 활용하여 이익을 남기고, 본래의 액수를 채워 넣는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환곡은 1,000만 석으로 증가하였는데, 환곡의 지역적 불균형이 나타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곡물을 옮기는 이무(移貿)를 시행하도록 하였고, 곡물을 옮길 때 편의를 위하여 곡물 대신 동전으로 바꾸어 옮기는 이무작전(移貿作錢)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곡식을 옮기거나, 지역적 · 계절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등 많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조선 후기에 조선 왕조는 기근이 발생했을 때 진휼의 재원을 확보하거나, 산성의 수리 비용 등을 조달하기 위해서 창고에 보유한 곡물을 가지고 식리(殖利) 활동으로 비용을 조달하도록 허락하였다. 비용을 충당한 뒤 창고에는 본래의 수량을 채워 넣도록 하였다.
조선 왕조의 재정이 부족하였던 17세기에는 강화도나 남한산성에 비축한 재원을 각 고을에 빌려주면, 각 고을에서는 이를 활용하여 이익을 남기고 다음 해에 빌린 액수를 상환하였다. 이를 입본(立本)이라 하였는데, 감사(監司)나 병사(兵使) 등도 비축된 재원으로 입본하여 이익을 남겨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환곡의 총량이 1,000만 석에 이르자, 교통이 편리한 연해읍(沿海邑)에는 곡식이 줄어들고 교통이 불편한 산군(山郡)에는 곡식이 늘어나는 지역 간 불균형이 깊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곡물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옮기는 이무(移貿)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곡물을 옮길 때 운반의 편의를 위하여 곡물 대신 동전으로 바꾸어 옮기는 이무작전(移貿作錢)이 시행되었다. 이무작전으로 이익을 남길 수 있게 되자 각 관청에서는 지역적 · 계절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곡식을 운반하고 이익을 남긴 뒤 본전을 충당하는 이무 입본을 시행하였다.
입본하는 과정에서 동전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봄에 곡물 대신 동전을 분급하고 가을에 곡물로 받아들여 이익을 남기는 전환(錢還) 입본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부의 허가 없이 곡식을 판매하여 이익을 남기고 원곡을 채워 넣는 발매(發賣) 입본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입본의 시행 과정에서 곡식을 동전으로 바꾸는 행위는 운반의 편의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환곡 운영에서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 전환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동전을 매개로 한 환곡 운영은 지역적 · 계절적 가격의 차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무입본은 지방 재정 확보나 지방관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