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고려 초기에 대찰의 면모를 이룩하였다. 약 7,500여 평의 절터에 있는 금당지(金堂址)에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초석(礎石)이 보존되어 있어 본래는 20여 칸의 대법당이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금당지 중앙에는 높이 약 2m의 화강석 불좌대(佛坐臺)가 있고, 금당지 앞에는 1983년 보물로 지정된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또, 절터에 있는 민가의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는데 그 크기는 135×85㎝이며, 전면과 측면에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상부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3층 석탑으로부터 북쪽 약 50m 지점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가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冲)이 지었고 글씨는 김거웅(金巨雄)이 썼으며, 1025년(현종 16) 건립되었다. 이 비석 서쪽 60m 지점에는 원공국사승묘탑이 있었으나, 민족항일기에 서울에 사는 일본인의 집으로 옮겼던 것을 1948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이 부도는 고려시대 부도의 정형으로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절터에서 약 30m 아래에는 높이 9.6m의 거대한 미완성품 당간지주가 있는데 돌을 운반하던 남매 장사 중 남동생이 죽게 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하며, 남동생이 옮겨오다가 둔 하나의 지주는 지금도 현계산 동남쪽에 있다고 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